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케네스 해긴 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실체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4. 20. 21:51




7단계 -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실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사시는 곳이 성막이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천국으로 올라 

가신 후 오순절 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신 다음부터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이 만든 지성소에 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전 6:12, 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이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삶의 위기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는 정복자이다. 창조주가 내 안에

사시므로 나는 승리자보다 더 크다.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큰 이가 내 안에

살고 계시다. 그분이 나를 끝까지 승리하도록 할 것이다. 그분이 나를 성공

하게 만드시므로 나는 실패할 수 없다."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뽐내는 것이 아니고,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성령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

들이 인생에서 겪는 시련 앞에서 겁이 나서 쩔쩔매고, 불필요하게 마귀가

그들을 패배시키도록 허락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어 울며 여기

저기 다니고, 가엽도록 작고 연약한 기도를 하면서 왜 그들이 승리할 수 없는

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그들을 도울 준비를 하고 

계심으로 언제나 도움은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주신 권능

(The Enduement of Power on the Early Church)



신약 성경에 있는 교회에서는, 믿는 자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자연적

표적이 수반되는 성령 충만함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그런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셔야

하는 필요성을 알았고, 그들은 초신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이것을 강조하였

습니다. 



행 8:14-15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행 9:17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19:1-2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물론 오늘날 교회에도 이러한 권능의 부여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말했습니다.


확대 성경 번역본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너희가(고린도에 있는

전체 교회) 하나님의 성전(그의 신성한 장소)인 것과 하나님의 영이

네 안에서 영원히 사시는 - 네 안(집합적으로 한 교회로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에서 집을 삼고 계시는 것을 분별하고 이해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전체 교회를 한 몸으로 볼 때

그 안에 사실 뿐 아니라 개개인 안에도 사십니다.


"당신 안에 집으로 삼으시고(to be at home in you)"란 표현을 주목하

십시오.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몸을 그의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더 이상 구약시대와 같이 사람이 지은 지성소에 살지 않으십니다. 


그 시대에는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하나님을 뵈러

예루살렘에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지성소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감히 거룩한 임재에 접근할 수 없었고 대제사장만 대단한 

예방 조치를 한 후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거룩한 장소를

침범하는 자는 즉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은 끝나고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구속의

계획이 끝났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속은 예수님

께서 죽으실 때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을 얻기 위하여

희생제물로 그분 자신의 피를 가지고 천국의 지성소로 올라가셔야만 했습

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개자로서

그분의 중재적인 중보를 시작하시기 위하여 승천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까지 새로운 언약은 유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 그분은 구약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 베일,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커튼이 위로부터 아래로 두 조각으로 찢어졌습니다.


유대인이며 역사학자인 조세퍼스(Josephus)는 이 커튼은 폭이 40피트,

높이가 20피트, 두께가 4인치나 된다고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이만한

크기의 것을 두 조각으로 찢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해 보십

시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래로부터 위로 찢어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오히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던 것입니다(마 27:51). 이것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시켰던 커튼을 찢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이 만든 지성소를 떠나셨고 그곳에 다시 사시지

않습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임재는 우리 안에 사십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저 신나는 경험 그 이상입니다.

거룩한 인격체이신 성령께서 사실적으로 당신 안에 사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놀라운 진리를 온전히 깨달았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가 우리 일생의 항해를 마칠 때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권능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한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불일 듯 일어나셔서 우리 마음에 비췸을 주실 것

입니다. 그분이 우리 영을 인도해 주시고 우리 몸에 건강을 주시며

우리 삶에 모든 면에서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그분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확대 성경 번역본으로 다시 봅시다. "...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서 그의 거처를 삼으시고 영원토록 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 안에 사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잘못된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힘든 일을 하라고 부탁받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빨리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지요.


왜 우리가 이렇게 말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그 일을 해야 된다고

믿고 있고,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나는 할 수 없어요''나는 할 수

있어요'로 바꾸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이 내 안에 계심으로 나는 할 수 있어요. 내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가와 상관 없이 우리는 "그분이 내 안에 사시므로 그분이 나를

성공시키실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 이런 종류의 말이 믿음의 말인데 그런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도록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모든 것을 인수하셔서 

주장하실 줄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성령님

께서 그들의 두목 같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신사(gentleman)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안내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극해 주시고 권하시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을 강요하시거나 지배하시지는 않습니다.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사람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면서 지배하지만 성령님은 신사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내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돕는 자로 보내지셨으므로,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를 위해서

일하게 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하여 일하라고

보내지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일하는 것을 돕기 위해 보내지셨습니다.




확대 성경 번역본에서 에베소서 3장 16절을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풍성한

영광의 보고로부터 너희 가장 안쪽과 인격에 사시는 성령(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거대한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며 강화시키시기를

바라노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믿음을 통하여 내 심령 안에 자리잡으시고,

거하시며 그의 영원한 거처를 삼으시고 사시길 바라노라."



이 성경 구절에서 바울은 이미 거듭났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 안에 사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심령에서 우리 심령의 보좌에 앉은

왕으로 다스리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극속수의 사람만이 그분에게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해주시기를

원하면서 밖의 것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주님, 가까이 오세요. 가까이 오세요."라고 노래합니다(우리는 그분이

우리 가까이 오시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손을 내밀어 주님이 지나가실 때 만져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니 이런 모든 것들은 감각적 지식일 뿐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몸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육체적인 것들입니다. 


누군가는 "그렇지만 성경에 있는 혈루병 앓는 여인은 손을 내밀어 주님을

만졌지 않나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사실 때의 일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손을 내밀어

만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 안에 계시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고 믿지 않는 한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알고 믿지 않는 한 성령께서

스스로 일어나 주관하지 않으시니까요. 우리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

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총명하게 행동할 때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내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십니다. 더 크신 이가 

내 안에 사십니다. 나는 그분을 의지합니다. 그분이 나의 항해를

마치게 하십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므로 나를 성공시키십니다.

창조의 주가 내 몸 안에 거처를 삼고 사십니다."



기억해야 할 구절 : "내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 케내스 해긴 목사님의 [믿음의 계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