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2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3. 17:47






벧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이 어디서 오느냐?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다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 받기를 원하는데 정말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해야 되고 예수님을 원해야 합니다.


말씀을 단순히 듣는 데서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아는 데서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 때 은혜가 오고 예수님을 알 때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경을 잘 아느냐가 아니고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아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주님을 잘 아느냐 


거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 다음 구절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사모할 만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애써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노력해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는데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이것을 주시는 통로가 뭘까요?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여기 또 다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 때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 주님을 알 때 경건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


생명의 근원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생명은 주님을 아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경건이 어디 달려 있느냐? 


지식적으로 주님을 알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게 되면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경건의 능력입니다.


벧후 1:4-8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여기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이게 무슨 말일까요? 


믿음만 갖지 말고 믿음에 덕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 됨으로써 주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알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 됨으로써, 여기 보니까 "더욱 힘써라", "공급하라" 우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더욱 힘써라", '공급하라" 이런 삶을 살도록 이런 성품의 소유자가 되도록


더욱 힘써라, 공급하라. 그래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게 된다.


그래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주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막힌 것이 없이 주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주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만 알고 예수님을 실제로 모르느냐?


왜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모르느냐?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내게 가르쳐 주옵소서. 


제가 주님을 정말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도 


믿음에 덕을 쌓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믿음에 덕을 쌓아야 되고, 덕에 지식을 쌓아야 되고 지식에 절제를 쌓아야 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해야 되고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해야 되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게 되고 그리고 친밀한 교제 속에서


주님을 점점 더 깊이 알게 되고,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것이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생명이고 그것이 경건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5) 고 말씀했는데 경건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것이 경건의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권면한 대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막힘없는 교제를 나누고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주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3절에 기록된 대로 생명이 우리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역사가 거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강물처럼 흐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력이 넘치면 죄를 이기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면 육체를 이기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면 세상을 이기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거기에서 경건의 능력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 금을 보고 동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금을 보고 은을 원하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 이상 세상 것을 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돈에 대해서 


무심해질 것입니다. 명예와 쾌락에 대해서 무심해질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하와가 선악과를 봤더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따먹은 겁니다. 


그것이 먹음직하게 보이고 보암직하게 보이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한, 


시간 차이입니다. 


얼마나 참느냐 시간 차이이지 결국은 따먹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높은 산으로 이끌어 가서 세상의 부귀 영화와 모든 좋은 것을 


다 보여 줬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것을 물리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이 보암직하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그것이 먹음직하게 안 보이고 탐스럽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알고


하나님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광과 위엄을 분명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아는데 마귀가 보여준 세상의 부귀영화, 공명을 보니까 


이것 다 시시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와가 봤던 것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면


예수님이 굴복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런 것들이 초연한 것들입니다.


여러분, 경건한 삶이라는 것은 노력으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과 결심으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란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가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뭔가 변화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내가 거룩하게 살려는 것,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려는 것, 이런 노력과 결심으로


이런 것만으로 그것이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뭔가 우리 속에서 새로워지는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겉 사람은 후폐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우리가 새로워져야 됩니다. 그래서 보는게 달라져야 됩니다. 


똑같이 보지만 보는 게 달라지고 느끼는 게 달라지고 우리 가슴속에 


느껴지는 그 가치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죄의 유혹에, 세상의 유혹에 초연해질 수 있는 것이고,


그래야 정말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친구가 되고 


주님의 신부가 되는 삶이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근본 비결이 어디 있느냐? 오늘 성경 말씀이 밝히는 대로 


하나님을 아는데 있고 예수님을 아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도 말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화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화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부자의 부함보다도 학자의 지혜보다도 용사의 용맹보다도 훨씬 더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고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알기 위해서 세상에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여기노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더 고상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더 가치 있고 귀한 것은 없다(빌 3:8).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살아갔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좀 더 알기 위해서 살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야 우리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가 누리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사는 그 근원이 되는 우리의 생명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생명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야 우리가 돈에 대해서 명예에 대해서 쾌락에 대해서


세상 것, 땅의 것에 대해서 초연해지고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데 집중하고


영혼들 사랑하는 데 집중하고 위의 것을 찾고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이 비로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례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어디에 달려 있느냐? 


주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 알기를 힘쓰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떻하면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을 이렇게 중요한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가? 두 가지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에베소서 1장 17절 말씀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은 계시의 영이신데 성령 충만은 단순히 성경의 진리를 계시하는 영이 아니고 


성령 충만은 아버지를 계시하는 영이십니다.


예수님을 계시하는 영이십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 19:10)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결국 예수님에 관한 계시를 받고 예수님에 관해서 예언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는 영이요, 성령은 예수님을 계시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충만하게 채움을 받고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또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말씀한 대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것.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우리 주 예수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이런 일에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에 주님을 아는 데도 게으르고 더딘 것입니다.


이런 일에 힘쓰게 되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들이 실제적으로 


허물어지고, 예수님과 실제적으로 교제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고 교통하게 되기 때문에, 사람이 만나서 교제하면 할수록


상대에게 대해서 더 실제적으로 잘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현 시대에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근원적인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혜와 계시의 영을 충만히 구하시고, 그 다음에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자기와 싸우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굴복시키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예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성경 지식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고, 체험도 아니고,


무슨 직분들도 아니고, 무슨 사역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넘치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충만해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에녹처럼,


왜 에녹은 죽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넘쳐 났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에녹 속에는 죽음이 그를 정복하지 못할 정도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의 속에 넘쳐 났을까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을 누구보다도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누구보다도 친밀히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경건의 근원이기 때문에 에녹은 죄짓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에녹은 완전히 죄 짓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에녹 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그를 삼킬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주님을 깊이 알아감으로 말미암아


지식이나 은사나 무슨 직함이나 사역이나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이 점점 우리 속에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경건에 능력이 점점 우리 속에 있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우신 목적이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우리 속에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점점 온전케 되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사"(엡 5:26-27)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만드는 것이 마지막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인 것처럼 


하나님을 깊이 알아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깊이 알아감으로 말미암아,


점점 경건의 능력으로 온전해지고 흠이 없이 거룩해져서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걸맞은, 예수님께 어울리는 신부가 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될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이제 내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를 의지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나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물 붓듯 부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날마다 예수님을 알아가고


날마다 내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증가되고 날마다 내 속에서 


경건이 증가되게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 제 5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