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2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3. 17:43






막 11:15-16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모세가 


스스로 모세오경에 썼는데,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모세처럼 


스스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온유하신 분인데 여기 보면 굉장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온유하신 분이 성전에 들어가서 매매하는 사람을 내쫓아 버리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밥상 엎어 버리는 것은 혹시 보셨는지 몰라도 


예수님이 성전에 가서 의자를 엎으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보통 집도 아니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것들을 가지고 나가라 하시면 되지 성전에서 의자를 엎어버리고 


돈을 쏟아 버리고 하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외모를 보지 말고 중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혈기 때문에 했으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의 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데서 나온 마음,


그런 동기에서 나온 과격한 행동이면 하늘에서 받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열심이 예수님을 삼켰다고 


요한복음 3장 17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잘못된 일이지만 비느하스가 간음하는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고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그에게 약조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목회자는 이런 것이다. 사역은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을 잘 분별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목회자가 늘 점잖기만 하고 늘 부드럽기만 한 것은 반드시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과격한 모습도 있고, 어느 때는 화도 나고..., 


화는 혈기도 있고 의분도 있습니다. 성경은 의분을 금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데서 나오는 혈기는 죄악이지만 


사랑 때문에 나오는 혈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분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화가 나서 때릴 수도 있지만, 자녀에 대한 사랑이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사랑의 매를 가장한 폭력이지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자녀를 염려하기 때문에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정말 자녀를 아끼고 자녀가 염려되어서 화가 날 수 있고, 


그래서 폭력적일 수도 있고 세게 때릴 수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사랑의 매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종교가 만들어 내는 어떤 틀에 박힌


사람이 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것을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들이 다 얌전하고 고분고분하고 점잔 빼는 것을 싫어합니다.


종교적인, 종교가 만들어 낸 어떤 규격에 딱 맞는 목사, 그런 규격에 딱 맞는


목소리의 소유자, 몸짓의 소유자,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 


그런 것은 제 스타일에 안 맞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 특히 성경에 나오는


우리의 완벽한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진정한 온유가 무엇인지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규격화된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화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 겸손이 있는 것처럼 거짓 온유가 있습니다.


가짜 겸손이 많이 있는 것처럼 주님을 의지는 안 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가짜 겸손입니다. 


저는 너무 많은 목사들이 가짜 겸손을 가지고 있고 자기 머리를 의지하고,


자기 지식과 수단을 의지하고, 기도도 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을 멸시하는 그런 오만 방자하면서 성도들 앞에서는 너무 목소리가


겸손하고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이거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겸손이 아니라 가짜 겸손입니다.


진짜 겸손은 정말 자기 부족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정말 주님의 필요성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말씀 말씀할 수 없고, 


그래서 성령을 사모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기름부음을,


성령충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와 기름부음을 터부시하면서


늘 강해 설교하면서 종교적으로 사람이 아주 세련되게 자기 자신을 


훈련시켜서 솜사탕처럼 부드럽기만 하고 이런 것들은 거짓 겸손입니다.


마친가지로 거짓 온유가 있습니다. 


의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진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요,


진짜 의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진리를, 의를 진짜로 사랑하면 의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혈기와 의분의 동기, 뿌리를 보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니라." 로마서 11장 6절에 나온 것처럼,


그뿌리가 주님에 대한 사랑이고, 그 뿌리가 의, 진리에 대한 사랑이면


진짜 의분이고, 그 뿌리가 미움이고, 증오고, 사랑이 없는 것이고 


여기서 분노가 나오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오래 참지 못하는 것이고


사랑이 없기 때문에 성내는 것이고 그것은 죄악된 분노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의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온유한 사람은 가짜입니다.


아나운서가 뉴스 진행하는 것처럼 슬픈 소식이나 기쁜 소식이나


목소리가 똑 같은 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온유한게 아닙니다.


분노할 때는 분노할 줄 알고 슬퍼할 때는 슬퍼할 줄 알고


기뻐할 때는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에 보면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은 의롭고 정당하고 합당한 분노에 의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옥에 던져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산이 망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을 뺏기는 사람도 있고,


죄가 드러나고 심판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재판장이 재판하면서 강도나 강간범이나 실인범이나 유괴범의 죄를 보면서


당연히 분노를 느끼지, 온유하기 때문에 유괴범을 보고도 분노심이 


안 느껴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규격화된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짓 인격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짜 온유와 가짜 겸손을 갖지 마시고 진짜 온유하시고 


진짜 겸손하시는 예수님처럼 여러분도 진짜 온유한 분이 되시고


진짜 겸손한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원을 가면 답답한 것이 있는데 왜 나무들을 자르느냐고요?


가지치기를 해서 작게도 하고 동물 같게도 하고 그게 뭐가 좋습니까?


나무는 나무라야 좋은 것이지요. 


나무는 가지가 척척 뻗고 낙엽이 떨어져야지 낙엽을 왜 다 씁니까?


낙엽이 떨어져 있어야 가을의 정취도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공원에 가면 쉬 식상 되지 않습니까?


나무들을 군인들 머리처럼 싹둑 잘라놓고. 아니, 자라는 나무를 왜 위를 자릅니까?


기분 나쁘게, 끔직스럽게, 나무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 것이 좋은 것이지요.


인격도 자연스러울 때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제일 망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투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목사투, 설교투로 설교하면 길들여진 


성도들이나 듣고 있지 일반 사람들 보고 들으라고 하면 짜증냅니다.


설교자들이 스피치, 웅변을 배우는데 그것 어리석은 것입니다.


설교와 웅변은 틀립니다. 


웅변대회 때 외치는 것을 누가 듣습니까?


웅변대회 때 외치는 것은 얼마나 기교를 잘 부리나


그것을 보는 것인데 설교는 기교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웅변적으로 설교하면 안 됩니다.


열정적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는 웅변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제스처를 배우는 목사도 있는데 제스처란 게 다른게 없습니다.


제스처를 너무 현란하게 하는 목사들이 많은데 그냥 손 가는대로 가고


가만히 있고 싶으면 있고,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지 


평안하면 평안하게 얘기하고, 흥분했으면 흥분하며 얘기하고, 


열정이 있을 때는 열정적으로 외치고, 재미난 얘기는 재미나게 얘기하고


막 깔깔 웃고... 그래야 사람들이 다섯 시간을 이야기해도 지칠 줄을 모르지


다섯 시간을 앉혀 놓고 웅변을 하고 설교자 스타일로 설교하면 


등뼈가 쑤셔서 못 있습니다.


설교학은 신학교에서 배우지 말고 저한테 와서 배워야 된다니까요. 


"말, 너 하는 대로 해라. 네 마음대로 해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스피치 끝난 겁니다. "제스처, 손 가는 대로 가라." 


사람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겁니다.


엉성한 것 같아도 자연스러운 냇물이, 숲이 좋지, 인공적인 것은 싫습니다.


금장 질려 버립니다. 


그러니까 말도 자연스럽게 하고 제스처도 자연스럽게 하고


인격도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입니다.


종교화된, 규격화된 인격을 가지지 마십시오.


겸손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겸손이라야, 자연스러운 온유라야 


좋은 거고 그렇지 않고 종교적으로 꾸며진 겸손과 온유를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자연산 온유고, 자연산 겸손입니다. 


'나는 온유해. 온유한 사람은 화낼 수 없어. 나는 온유하니까 


목소리 높일 수 없어. 상스럽고 품위 떨어지니까.' 


아니오. 예수님은 항상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온유하신 그분이 가서 상을 뒤집어엎으신 겁니다.


온유한 그분이 온유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고, 온유한 그분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렇게 외치신 겁니다.


여러분, 종교회된 온유가 아니라 예수님같이 자연산 온유를, 


자연산 겸손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제가 자연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꾸미는 것이 없고 규격화된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냥 자연에서 물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사는 것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보는 것도 규격화가 문제 아닙니까?


교리를 가지고 규격화해 가지고 말씀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말씀은 오른 쪽으로 가라는데 규격대로 따라가니까 한국 교회가 이 모양이고


수많은 성도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봐도 자연스럽게 말씀을 쫓아가고 성령도 방언은 되고, 


예언은 안되고,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똑 같은 성령인데, 방언은 옛날부터 받아들이는데 예언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말이 많은 건지. 이렇게 규격화시키는 것은 안 되고


물 흐르듯이 자연산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말씀도 자연산, 성령의 은사와 역사도, 인격도,


설교의 말이나 제스처도 자연산이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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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승우 목사님의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 제 5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