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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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는 구원의 대가!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12. 5. 22:28




값없는 구원의 대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구원은 "값없이" 얻는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이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된 의미에서만 진리입니다.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없고,

노력으로 획득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선행을 근거로 흥정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보면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이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값없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서도 영생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값없는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값비싼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 값을 계산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값없이 거저 얻는다는

것은 구원이 "값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구원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거나, 하나님의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싸구려"가 아닙니다. 구원에는 치러야 할 

값이 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5-33)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값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지하게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값을 지불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권리를 갖게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길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는 실제적으로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영생을 얻고자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의 요청은

진지했지만, 그는 값을 지불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가복음 10:17).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그의 태도에는 진지함과 열망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당신과 내가 당시 그 무리 가운데 있었다면, 그의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달려왔습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옳은 것을 구했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구하고 있는 것을 얻으려면 다루어야 할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이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필경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며, 그 사람에게는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가서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가복음 10:21). 좋든 싫든,

이것이 그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필요한 예수님의 정확한 처방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마가복음 10:22).

앞서 21절에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떠나기로 선택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그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불러 세우고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게 너무 어려운 걸 요구했던 것

같아 미안하구나. 네게 겁을 주어 내쫓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럼 타협을

해보자. 너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냐? 모든 것을 팔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럼 어느 정도는 기꺼이 팔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타협이나 협상이나 흥정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요점은 무엇입니까? 부자인 것이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부자인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마가복음 10:23)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부하려 하는 것과 돈을 사랑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부하려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9-10).


돈을 사랑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성경은 많은 경고를 하고 있으나,

부를 지니고 있는 것 그 자체가 나쁘다고는 말한 적이 없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부를 주시기도 합니다.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인데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문제는 부 그 자체라기보다는 부를 사랑한 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진정한 문제였습니다. 


산상수훈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언급한 그 부자 청년과 대화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삶에서 

신(神)이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셨습니다. 바로 재산이 그의

신이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

니다: "네가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하나님을 너의 새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네 삶 속에서 하나님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드려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모든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의 재산과 돈이었습니다. 돈이 그의 주인이요 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라야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데,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참 하나님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현제 모시고 있는 신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너는 마땅히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준 후에, 다시 말해 너의 신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난 후에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어려운 요구라고요? 아마 그렇게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문제에 관해서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 낮은 수준을 제시

하여 협상을 하지 않으셨으며, 그에게 예외를 허용치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하면서도 단호하게 그 사람을 보내셨고, 그 사람은

미련없이 돌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한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살펴 보기에 앞서 잠시 멈추고 생각해 봅시다.

만약 이와 같은 사람이 당신의 교회에 와서 앞으로 달려나와 무릎을 꿇고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떤 대답을 듣게 될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요즘 교계의 다양성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천 가지의 서로 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관한

많은 "공식"들이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왔는데, 점점 더 값싸고 용이해지는

방향으로 변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세례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뿐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 많은 교회에서는 그를 자리에 앉히고는 "그것은 아주 간단

합니다. 예수님을 당신 마음 가운데 들어오시도록 요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관연 맞는 말일까요? 나중에 살펴

보겠지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그 마음 속에 모셔들이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거하신다는 것은 완전히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께서

그 안에 계시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청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들어가신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

100% 맞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내용의 기도를 하면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확신시켜 줄 것입

니다. 그리고 그에게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하는지에 대해 몇 마디 조언을 

해주고 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교회에 빠지지 말고 참석하도록 권하고

나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는 이 부자 청년이 회심했다고 교인들에게 알립니다.

모두들 기뻐하며, 특히 재정을 맡은 집사가 좋아합니다. 


이 새로운 결신자가 헌금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장차 교회 재정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로 가슴이 부풉니다. 그 사람은 최근에 낚아 올린 대어(大魚)인 

까닭에 그에게 간증을 해보도록 요청하며, 기업가들의 점심 식사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는 등 그를 최대한 활용합니다. 


문제는 단 한 가지, 당신이 6개월 가량 지난 후 그 교회의 기도 모임에 나가

보면, 교인들이 "그 부자 청년"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

입니다. 교인들은 "그 젊은이가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점차 영적으로

냉담해지고 있고 흥미를 잃어 가고 있다."고 말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으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차후에 누군가가 그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하면, 그는 "그만두십시오. 나도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 번 시도해

봤었지요. 그런데 헛일이었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젊은이는 마음에 조금도 미련이 없이 떠나갔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였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찰스 프라이스의 [진정한 그리스도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