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3

[능력으로 관통되는 복음!] 4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 하는가?

놀라운 주의 사랑 2022. 9. 6. 01:28

 

 

   신학생 때 로마서 주석들을 읽다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대발견을 했습니다. 구원에 세 가지 시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과거시제로 표현된 이 '구원'은 중생 혹은 칭의를 가리킵니다.

 

  빌립보서 2:12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현재시제로 표현된 이 '구원'은 성화를 가리킵니다. 

 

  디모데후서 4:18  "...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

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미래시제로 표현된 이 '구원'은 영화를 가리킵니다. 모두가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은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단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칭의 뿐 아니라 거룩(성화)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런데 5년 전, 김세윤 교수님의 『칭의와 성화』라는 책을

읽다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칭의론도

신약 구원론의 보편적 구조, 즉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벌써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완성은 아직 받지 못하고, 그의 재림 때에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종말론의 보편적 구도

입니다. 칭의론도 그 구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구원과 관련 있는 다른 주제들처럼, 칭의에도 '이미'와

'아직'의 측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첫 단추인 칭의만

칭의가 아닙니다. 구원의 완성인 영화도 칭의입니다

(롬 2:13, 이 구절에서 의롭다 하심이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

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또한 갈 5:5 "의의 소망" 이라는

표현에도 주목하라). 그것은 아직의 칭의(혹은 궁극적인 칭의)

입니다. 나아가서 둘 사이의 성화 역시 칭의의 일부입니다.

이것을 김세윤 교수님은 의에 법정적인 개념뿐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도 있다는 것을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칭의는 단지 죄 용서나 의롭다하심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므로 그때부터는 순종이라는

의무가 부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게 사는 것인 성화

역시 칭의의 한 부분이고 칭의의 현재적인 국면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칭의의 교리로 구원론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읽고 탄복했습니다. '왜 나는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구원을 '구원의 서정'

칭의, 성화, 영화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강해할 때,

루터처럼 로마서 3장 후반부터 5장까지를 칭의의 교리를 설명

것으로 봅니다. 로마서 6장에서 8장 전반부까지는 성화를,

그리고 로마서 8장의 후반부는 영화를 설명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위 견해에 의하면 로마서 6장은 물론 8장까지도

칭의를 설명한 것입니다. 즉 로마서 3-8장 전체가 칭의를

설명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로마서 3-5장이 칭의를 말하고 있고 그것만이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6장부터는 성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원론'을 조직신학적으로

다룰 때는 '중생, 성화, 영화' 다 구원론이라고 인정하지만,

막상 복음을 전하거나 설명 할 때는 칭의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믿기만 하면 성화와 상관없이 모두 천국에 갈

것처럼 전하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영혼들에게 치명적

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실종되어 버림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의로 구원론 전체를 설명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과 칭의를 좁게 보지 않고 성경대로 넓게 보면

단순히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성화가 중요해집니다.

성화가 없으면 영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런데 제대로 성화되려면 견인의 교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세윤 교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대다수 신자들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이미 의인으로 칭함받음에 자만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것을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하여

구원파적 안일에 빠지기까지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구원받을 자들을 선택하여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시고, 그 예정에 따라 구원하신 자들은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

이미 의인이라 칭함받았으니, 나는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이고, 그러기에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나를 지켜주시리라. 그러니 나는 이제 어떤 경우에도

구원의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이 말은 대게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 없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내포함)라고 여깁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이 복음의 진리라고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많은 정통 목사들도 사실상 이렇게 가르치는데,

그들은 좀 슬그머니 가르친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같은 책에서 김세윤 교수님은 더욱 대담하게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적어도 우리 개신교도들에게는 어떤 교회사의 인물도

성경보다 더 위대하고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이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좀 일방적인)

예정론을 추종하기 위해 성경에 분명히 구원의 은혜로부터

탈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피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 견인의 교리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한지 이제

아시겠지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은 '사람의 계명'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

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착각은 복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면 복음이 능력일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면 행위 심판의 진리가 무색해

집니다. 같은 맥락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을 받는다는 진리도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을 통해 굳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처럼 그것은 전체 복음 진리에 반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미혹입니다!

 

..........

 

 

 

 

- 변승우 목사님의 [능력으로 관통되는 복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