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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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믿음

놀라운 주의 사랑 2018. 12. 28. 02:11



두 가지 믿음




성경은 두 가지 믿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즉 도마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 영적인 믿음,

즉 심령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도마는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믿음을 가졌

습니다. 구원을 받았든 못 받았든 모든 사람은 이러한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마의 믿음은 오직 육체의 증거에만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볼 수

있는 것만 믿었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 20:24-29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하시니라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만약 아브라함이 보이는 것과 그의 육체의 감각이

말하는 것에 의해 살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결코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99세의 할아버지와 90세의 할머니는 자녀를 갖지 못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많은 나라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졌고,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롬 4:17-21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음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내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었지, 그가 느끼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느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보는 것에 근거해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육체적 감각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에 말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나라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는 이미 아이를 낳을 나이가 한참이나 지났음에

도 불구하고 속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못하

실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그것을 이루실 수 있을 뿐아니라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

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

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브라함의 축복은 영적, 육체적, 물질적인 세 가지 차원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었습니다.


그 축복은 영적 축복, 육체적 축복(건강 또는 치유), 물질적 축복(재정

적인 부요) 포함합니다. 


저주에는 질병, 가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

이라."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

이여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축복은 우리의 것이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

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산을 물려 받을 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축복의 상속자란 뜻입니다. 여기 "약속"이라는 단어가 다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

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우리는 약속대로 유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 약속의 한 부분을 받았듯이 우리도 그 방법 그대로

그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믿음으로는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얻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도마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지 못하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나 자연적인 관점에서 느낄 수 있는 것만 믿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느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뭔가를 가졌다고 느낄 때,

그들이 가졌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진 것 같지 않다고 느낄 때는

가졌다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느껴질 때에야 구원 받은 것을 믿습니다.

기도 응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이 신체적 증거

또는 감각 지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종종 기도 응답이나 치유를 얻는 것에

실패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느낌이 좋아지든지 영적으로 고조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

는 분이십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5:16). 


물론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제하다 보면 기분이 더 나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기분이 나아졌다거나 영적인 체험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정

한 기도를 응답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기분이 나아진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

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내가 그분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을 사용하면 당시의 내 기분과는 상관

없이 그분의 약속을 붙잡은 것으로 인해 응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두 가지 차원입니다. 속사람과 겉사람이 있습니다. 속사람은 

영입니다. 겉사람은 몸입니다. 마음(heart, 심령)으로 믿는다는 것은 속에서

믿는다는 의미이며, 속사람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눈에 보이는

증거에 두는 것은 자연적인 인간적 관점에서만 믿는 것, 즉 겉사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은 심령의 믿음이며 눈에 보이는 증거가 어떠

하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속사람으로 믿어

믿음이 겉사람에게까지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속에서 믿기 전에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몸, 즉 육체의 감각으로 하여금 이들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겉사람, 즉 육체가 말하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치유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지, 그의 증상을 보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치유 받은 것을 알고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심령으로 믿기 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심령으로 그것을 믿고 입으로 말하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

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보는 것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내가 느끼는 것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믿는 것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방법입니다. 이와 반대로 도마는 "내가 보고

느끼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두 번째 자리에 두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몸, 즉 신체 감각의 집을 최우선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은 육체의 감각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또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

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라고 한 부분을 주의 깊게 보기 바랍니다. 

"내가"는 진짜 바울인 속 안의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 속사람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것을(I bring it)"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일 뿐입니다. 


만약 당신의 몸이 진짜 당신이라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복종하게 함은."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복종하게 함은." 다른 말로 하면, 그는 그의 몸이 그를 

다스리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육체의 감각이 그를 지배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수 세기 후 스미스 위글스워스가 다른 용어들을

써서 말한 것과 같은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방식들로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엄격한 규칙들과 규정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거룩하고 하나님께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육신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몸이

언제나 그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누구보다도 가장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영역이나 믿음의 영역에서 살기보다는 감각의 영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들에 관한 한 그들은 모든 규정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하고 추한 영, 그리고 번드르르한 

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만난 다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규칙들과 규정들을 지키고

있지만 그들은 가장 훌륭한 영을 가지고 있고, 그들과 한 자리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은 내게 축복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느낌을 우선으로 할 때, 느낌이라는 것은 육체의 목소리

이기 때문에 결국 당신은 육체를 우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스러우면, 새벽 1시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가다가 발가락을 어딘가에 부딪쳐 보십시오! 그러면 느낌이 정말 육체

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느낌을 맨 앞에 놓고, 그 다음에 그 느낌에 대한

믿음을, 그리고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

을 마지막에 둡니다. 순서를 거꾸로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두 번째에, 그리고 당신의 느낌을 마지막에

두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느낌은 육체의 목소리입니다. 이성은 머리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영의 목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대신에 이성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우리는 이성에

근거해서 행동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하나

님의 말씀이 반대될 때도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성은 99세의 할아버지와 90세의

할머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많은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이었습니다.


말씀에 반대되지 않는 한 이성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에 반대될 때에는 이성 대신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하십시오.


말씀보다 이성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곧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에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진짜 믿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