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1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성경적인 참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 허다한 목회자들을 맹인 인도자로 만듭니다!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5. 11:30




람의 마음을 옥토가 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신령한 것'(고전 12:1)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한복음 3:1-2)


니고데모에게 있었던 이런 관심이 다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받아들였습니다.

(마 21:31-32)


그런데 비성경적인 은사중지론자였던 루터와 

칼빈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목회자와 신자들의 

다수가 기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

입니다.


이것이 건전한 것이라고 세뇌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이 시대의 바리새인이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령한 것에 대한 관심은 마음을 옥토가

되게 하지만 미혹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불신자들을 무당이나 점쟁이나 신비종교에 미혹

되게 하고, 신자들을 현상에 치우친 불건전한 

영성운동이나, 비성경적인 황당한 입신간증, 

그리고 극단적인 종말론에 심취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가 신령한 것에

관심을 가져 바리새적이 되지 않으면서도 정로를

걸어가려면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를 바로 알고, 회개하고, 정결케 되고, 양심

적이고, 비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필요성을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자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

중 다수가 참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보기 위해 모이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라다녀도 즉 교회에 다녀도 참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진리에 관심이 없는 목사와

신자들이 우글우글합니다. 영성운동 단체들 안에도 

이런 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깊은 관심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참된 분별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분별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진리를 사랑해야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경만 열심히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즉 무엇이

진짜 성경적인 진리인가에 집요한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처럼 누구의 설교를 듣든지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입

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사도행전 17:1-12)


베뢰아 사람들은 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가지고 씨름했을까요?

그것은 진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진리를 옳게 분별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처럼 진리를 옳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물론이고 목사들까지도

무엇이 성경적인 참 진리인가에 대해 비정상일

정도로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진리를 옳게 분별

하지 못하고 교리와 전통만 가르치는 맹인 인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다수가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은

순전한 말씀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

하게 하여 잡탕을 설교하는 설교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슬픈 일인지요!

이들 엉터리 설교자들에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늘 사랑타령만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사랑에만 관심이 있고 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사랑으로 유명한 국제적인 한 강사에게서

다른 점들은 훌륭하지만 그런 맹점을 보았습니다.

그 부분이 옥에 티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가장 완벽한 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은혜로우실 뿐 아니라 진리로 충만하셨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시편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시편 85:10)


그러므로 인애만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서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야 합니다. 둘 다 갖춰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약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로마서 11:22)


하나님은 인자하기만 하신 분이 아니라 준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사랑타령만 하면 안 됩니다.

사랑타령만 하는 것은 영혼들을 위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혼들을 위해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도 타협하지

말고 그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진리에 무관심한 엉터리 

설교자들의 특징은 교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권인데 교단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다소간 교리들이 다릅니다.


어느 교단이든 그 교단의 교리 중 일부가 비진리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태평하게 무엇이 성경적인가에 관심이 없고

자기 교단의 교리를 맹신하는 무책임한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경(Canon)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논입니다. 카논은

원래 갈대, 긴 나뭇가지라는 뜻입니다. 정확한 자(尺),

즉 길이를 재는 도구가 없었던 고대에는 이런 것들을

자의 대용품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카논은 결국 어떤 것을 재는 기준, 척도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경으로

채택된 성경을 성도의 인식과 행위의 척도가 된다는

의미에서 캐논이라고 부릅니다.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이 기준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순도

100%, 즉 순전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2:6)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9:7-8)


성경은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과도 같습니다.

순결합니다. 불순물이 전혀 없는 100%짜리 진리

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자들이 사용하는 본문비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든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절대적인 진리이지

비평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시편 119:160)


여기서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은 모두 영원합니다." (새번역 성경)


"주의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 주의 의로운 법도는

모두 영원합니다." (쉬운 성경)


"주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며 주의 모든 의로운 법은

영원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이처럼 이 말의 의미는 시편 119편 151절에 

"여호와여...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이 진리라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진리입니다. 100% 진리입니다.


하지만 각 교단의 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교단의 교리도 100%가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말고 성경으로 

분별하여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김동주 교수님은 [성서적 사고하기]라는 책에서

"성서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이라는 주제로 이렇게

썼습니다.


"고정관념에 얽메이지 않기

올바른 성경 해석을 가로막는 것이 고정관념에 

따른 해석입니다. 성경 자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해석해 왔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렇게

성경 해석이 고착화되는 것을 늘상 경험했습니다.

종교개혁 후 루터와 칼빈의 해석이 절대화되었고,

자유자들의 해석도 전통을 비판한 하나의 해석

체계로 절대화 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들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주의 신념의 보수자들

이었습니다. 그리서 고착화된 해석을 넘어서는 

과정반드시쳐야 합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인 김세윤 교수님도

[칭의와 성화]라는 탁월한 책에서 그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적어도 우리 개신교도들에게는 어떤 교회사의

인물도 성경보다 더 위대하고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이 가르쳤

다고 생각하는 (좀 일방적인) 예정론을 추종하기

위해 성경에 분명히 구원의 은혜로부터 탈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피하거나 경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대 원칙들

중 하나가 '성경대로만' (sola scriptura)입니다.

교회의 전통보다 성경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의 일부가 자신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방법에 빠졌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나 교회의 전통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했던 것처럼, 지금 (한국) 장로교의

일부는 오로지 칼빈 이른바 '칼빈주의' 신학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칼빈이...

모든 진리를 다 터득한 것은 아닙니다. 칼빈 

이 후 지난 500년 동안에 많은 신학자들도 

성경의 상당한 진리들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만'의 원칙에 굳건히 서서,

우리 이전의 또 우리와 동시대의 신학자들이

산고 끝에 찾아낸 신학적 진리들을 겸허하게

경청하고 수용하면서 동시에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여 새로운 진리들을 부단히 터득해가야

합니다."


제가 늘 해왔던 지적인데, 이렇게 학자들을 

통해서 듣게 되니 신선하지요? 그리고 속 

시원하시지요? 이들 학자들이 지적한 대로,

실제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자기 교단의

교리 또는 자기가 믿어왔던 교리를 성경을

기준삼아 공정하게 분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나의 첫 번째 열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성경이 어떤 말을 해주기를 요구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그것을 허심탄회하게

들으려는 것이었다." 라고 존 스토트가 고백한

대로 그렇게 하기 위해 힘쓰는 분들도 소수

있습니다.


그러나 릭 조이너가 "진리를 추구할 때에 우리는

그것에 기꺼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어떤 문제 안에서 진리를 추구한다고 주장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그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이나 그들이 믿기 원하는 것을

확증하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기만의

토대이다." 라고 지적한 대로 대부분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진리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고 있고, 진리와 깊이 씨름하여 앞서가는

자들은 도리어 이단으로 매도되는 어이없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

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

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

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내가 돌아서라.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디모데후서 3:1-7)


목회자들의 진리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실제로

7절에 기록되어 있는 일이 수많은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교회들이 1-5절의 상태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이고 끔찍한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말라기 2장 6절에 기록되어 있는

레위인 혹은 제사장들과 같은 참 하나님의 종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제가 보기에 , 너무나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는 방법에만 매달리고 보다 중요한 설교의

내용 즉 무엇이 참 진리인가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바울과 달리 진리를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고린도후서 4:2)


바울은 설교를 통해 오직 진리를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했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디모데후서 2:15)


모든 목회자는 마땅히 진리를 옳게 분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 중요성

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그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 드리길 원합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