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찰스 G. 피니 글

율법적인 복종과 사랑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2. 3. 23:44




율법적인 복종과 사랑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율법적인 종교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리새인

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율법적인 사고 체계에서 나온

행위들도 있고 믿음에서 나온 행위들도 있습니다.


정부에 복종하는 데 두 가지 원칙이 작용합니다. 하나는 희망과 두려움의

원칙으로 양심의 영향을 받습니다. 양심이 옳고 그름을 지적하면, 그 사람은

희망과 두려움 때문에 복종합니다. 다른 원칙은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런 예는 가족 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 아이는 항상 희망과 두려움 

가운데서 복종하는 반면, 다른 아이는 애정 어린 신뢰로 복종합니다.

하나님의 정부에서 외면적인 복종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원칙뿐입니다.


인품, 이익, 나라, 지옥 등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을 설명해

줍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외적 복종을 할 수 있으며, 율법에 순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녀로서 신뢰감을 가지고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

갑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유일한 복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에서 나온 일정한 행동 수칙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정부에서는 믿음에서 나온 복종만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복종이며,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적이 결코 없으며, 있을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할 일도 없고 그분을 

신뢰할 이유도 전혀 없는 듯 생각합니다.


여기에 율법의 종교와 기독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적인 복종은

희망과 두려움의 영향을 받으며, 위선적이고 이기적이고 외적이며

강제적입니다. 


반면 복음에서 나온 순종은 사랑에서 나온 것으로, 진지하고 자유로우며

유쾌하고 진실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면서, 소위 말하는 정의의 원칙을 거부한 채 정의를 실행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의를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합니다.


율법의 종교는 율법적 사고에 기반을 둔 목적이나 희망의 종교이지,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좋아해서 선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죄를 기피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려 하며 종교적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희망과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그런 사고 체계에 근거한 목적은 사랑에서 나온 목적과는 상이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목적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실제로 좋아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일부 율법주의자들도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는 하지만, 그런 신뢰는

복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지닌 신뢰에서 나온 행위들은

희망과 율법에서 나온 율법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나온

신뢰도 외적으로는 율법에서 나온 신뢰와 동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전혀 다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힘겹고 번잡스럽고

도덕적이고 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삶을 힘겹게 살아갑니다.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애정 가득 찬 신뢰를 두고 사랑으로

그분께 순종합니다. 성도의 순종은 개인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힘겹게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혼에 즐거움이 되기 때문에 즐겁게

행합니다.


율법주의자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화되고 성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현대의 율법주의자들은

행위로 의롭게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구원받는 길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처음에 믿음으로 성화될 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만이

참되다는 실제적인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기대하면서도 율법의 행위들을 실행합니다.





예수님이 메신 사랑의 멍에




참된 그리스도인과 율법주의자 모두 선한 행위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할

수도 있고, 선한 행위들을 이루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복종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한 행위들을 실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는 둘 다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선행을 유발하는 동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사고 체계가 다릅니다. 이들은 동기를 유발하는

서로 다른 근원에 마음을 둡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실제로 선행을 훌륭히 수행합니다. 율법주의자도

선행을 행하려 합니다만, 그는 희망과 두려움과 개인의 이익에 대한 

이기적인 관심에서 행동을 합니다.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온 마음과 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가 행동하는 동기는 사랑에서 나온 복종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그분의 성품을

인지하고 이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애정 어린

신뢰가 있기에 사랑 안에서 쉽게 복종합니다. 이 사람에게 계명들은

슬퍼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습니다.

이 사람에게 지혜의 길은 즐거움의 길이며, 화평에 이르는 길입니다

(잠 3:17 참고).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까? 자신이 해야 할 의무들이 사랑의 강권으로

아루어졌습니까? 강력한 사랑의 줄로 엮어졌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함

으로 생기는 문제보다 불순종으로 생기는 문제가 더 심각합니까?

여러분의 애정이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급류 속에서 넘쳐납니까?


복종도 어렵고 사랑은 더더욱 힘겨운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을 기쁘게 하기가 힘든지 물어 보십시오.

아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네, 그래요. 남편에게 복종하기가 힘들고

남편을 사랑하기는 더더욱 힘들어요"라고 대답한다면 그 남편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자녀가 "아버지에게 복종하기가 힘들고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더더욱 힘들어요"라고 불평하는 소리를 부모가 듣는다면 그 부모는

어떻겠습니까?


그런 표현을 즐기는 사람들의 종교에는 극한 결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고통스러운 사람은 율법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기독교는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감동입니다. 

여기 지상에서 섬기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럽다면 하늘 나라에서는

어떻겠습니까? 하늘 나라로 끌려올라 가서 매주, 매년 영원히

어쩔 수 없이 종교 행위를 해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곳이 하늘 나라이겠습니까

아니면 지옥이겠습니까? 여기 지상에서보다 천 배는 더 많은 종교

행위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고 삶이 온통 그런 의무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지옥이 더 안식을 주지 않겠습니까?


한 부류는 희망과 두려움 때문에 종교적이 되려고 합니다.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양심이 스스로를 몰아 부칩니다.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기에서 행동합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이 의도한 바를 압니다. 나는 내 법을 그들 마음

속에 두어 그들의 마음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렘 31:33).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은 거의 모두 이런 경험을 합니다. 이 사람은 

죄의 찔림을 받았고, 율법은 그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이루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고뇌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고뇌에 싸였습니다. 안식도 만족도

없었으며,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고통 가운데 무척 애를 썼으며,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항상 냉담하고 이기적이었

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쁨과 영광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

습니까? 이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동일한 성령께서 그 위에 안식하시며, 전에 그토록 그를 슬프게 하고

고뇌케 했던 그 죄들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무릎을 치며

눈물을 쏟으며 죄를 자백합니다. 그의 마음은 녹아내립니다. 

지금도 전과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쇠사슬을 부수셨으며, 이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믿음 속에서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찰스 G. 피니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