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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교환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11. 2. 16:35


거룩한 교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과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짊어지신

것이,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모든

보화 창고를 여는 열쇠다. 십자가에서 어떤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예언하신 것이었다. 이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악한 형벌이 예수님께

내려지면서 예수님의 죄 없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누려야 할 모든

선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제 아래에 명시된 아홉 가지의 구체적인 교환을 하나씩 읽어보기 바란다.

한 가지씩 읽어가면서 악한 것에는 왼손을, 선한 것에는 오른손을 들어보자.



-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용서를 받게 되었다.

- 예수님이 상처를 입음으로써 우리는 치유를 받게 되었다.

-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죄가 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움으로 의롭게 되었다.

-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죽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 예수님이 저주가 됨으로써 우리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 예수님이 우리의 가난을 견딤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부요를 

  누리게 되었다.

- 예수님이 우리의 수치를 견딤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 예수님이 우리의 거절을 견딤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포용을

  누리게 되었다.

-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죽음으로써 새 사람이 우리

  안에서 살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루신 교환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산물이고,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아홉 가지 교환에 더하여, 십자가를 우리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해방의 다섯 가지 측면이 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 악한 현 세대로부터

- 율법으로부터

- 자아로부터

- 육체로부터

- 세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이 책에 3장부터 18장까지 이런 아홉 가지 교환과 다섯 가지 해방의 측면을

공부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 공급하신 모든 것을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취할 수 있는지 설명할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은혜다.

은혜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받을 자격이 되어 받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력해서 그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것을 노력으로 얻을 방법은 없다. 

그것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믿는 방법밖에 없다. 노력으로 얻어내려고 

하지 마라. 나는 그것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선량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득

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라. 당신은 그런 사람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못 될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공급하신 것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보내

셨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걸까? 성경은 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마 답은 영원히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노력하여 얻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을 정당화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희생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결정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고찰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두 가지 칭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번째 칭호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나온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the last

Adam)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굵은 글씨는 저자 강조)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하다. 45절에 따르면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호칭한다.

이 두 가지 칭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47절을 보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The second

Man)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굵은 글씨는 저자 강조)


보다시피 예수님은 처음에는 마지막 아담, 두 번째는 "둘째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칭호를 올바로 불러야 하고, 또한 올바른

순서대로 사용해야 한다. 올바로 부르지 않거나 올바른 순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셨다. 시간상으로 마지막이라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후로도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사람의

숫자가 수십억도 넘기 때문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이 물려받은 악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남김없이 예수님께 전가되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다.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모든

인류의 악한 유산이 예수님께 씌워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장사되었을

때에 그 모든 악한 유산도 함께 장사되었다. 아담으로부터 우리의 악한

천성이 제거되었고, 끝이 났으며,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그분은 둘째

사람으로, 새로운 종류의 인간으로, 임마누엘 종족, 신인 종족의 첫째로

일어나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은 이 새로운

임마누엘 종족에 속하게 된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을 그려보자.

이는 모든 것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인류에게는 우리가 저지른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장사되었을 때에

그 모든 형벌도 함께 묻혔다. 셋째 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새로운 종족, 곧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의 새로운 창조물로 신비롭게

신인 종족이 시작된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베드로는 부활을 죽음으로부터 탄생에 빗대어

표현했고, 에베소서 1장 22-23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묘사했다. 참으로 뛰어난

표현이다. 아기가 엄마의 태내에서 나올 때에 어느 부분이 제일 먼저

나오는가? 머리다. 일단 머리가 나오면 몸의 다른 부분이 따라 나오는

것은 보장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면서 우리의

보증인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 죽으셨다가(왼손을

들어보라), 둘째 사람으로 살아나셨다(오른손을 들어보라).





 데릭 프린스의 [속 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