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2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3. 17:36






행 3:11-12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니까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고 


병을 제로 고치신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침 받은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뿐 아니라 사역자 자신도 그래야 합니다.


사역자 자신이 자기를 주목하면 안 됩니다.


자기의 경건이나 능력이나 권능이나 은사에 주목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 주목하면 그것이 믿음 같은데 헛바람이 들어가 가지고 


가짜 믿음이 일어납니다.


자기를 주목하면, 자기의 경건이나 능력이나 은사를 주목하면, 


그것 때문에 기도하면 병이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도하면 낫지 않습니다.


"믿었는데 왜 그렇지?" 그것은 믿은 것이 아니고 착각한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혼동할 수 있습니다. 


자기 능력은 이것밖에 안 되는데 사람이 교만해지면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혼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형태로 자기 심령에는 와 닿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경건이나 권능이나 뭐든지 그렇습니다.


자기가 기도한 것이라든지 은사라든지 이런데 주목하면 헛바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하고 똑같이 느껴집니다.


믿음하고 똑같이 느껴져서 "기도하면 낫겠다." 그런데 기도해도 별로 


안 나으니까 이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로서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는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것으로써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한계이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외부에 의존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자기 경건, 자기 권능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 믿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것이고 교만 때문에 들어간 헛바람입니다.


가짜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를 바라볼 때 나오는 느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16절에 그것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이라는 표현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건이나 권능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기도나 내가 받은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주목하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말미암아 믿음이 나는 것입니다.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내가 기도하면 나을까?" 그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이다. 나는 내 은사를 의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을 의지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이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고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니, 이걸 어떻게 고치지?" 이 부담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고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고보서 5장 15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사실은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내가 믿음으로 기도해서 그 사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기도해서 그 사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니까 주님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믿음이 강하다." 이렇게 자기 믿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내가 고친다고 하면 어려운데


예수님께서 암 환자를 고치시는 것이 뭐 어렵습니까?


나는 그분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내가 기도해서 이 사람을 고쳐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탁하고,


병 고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것이 믿음과 사역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신유 사역도 축사 사역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분을 믿는 것이 신유 사역의 비결입니다.


내 기도나 내 권능이나 내 은사나 내 믿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믿지 마세요. 믿음을 믿으면 낭패를 당합니다. 


믿음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믿음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세요.


믿음은 우리 속에서 의심을 다 뽑아내고 믿음만 모으는 


이런 심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의지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예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더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지 믿음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기도해서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강하다, 약하다 그런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기도해서 고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자꾸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나는 못하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정리해서 머리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영으로 정말 거기에 제대로 올인 해서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도 이게 머리로는 되는데 영으로는 안 될 때가 많습니다.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영으로, "내 믿음이 고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도해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못하는데 예수님은 하실 수 


있고 그래서 나는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분을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그러면 주님께서 일으키실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을 내 영으로


분명히 붙잡고 기도하며 그 자리에서 모든 병이 다 낫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키가 자라라!"고 하면 키도 자랍니다.


각색 병들이 치유가 됩니다. 제가 그것을 해봐서 압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해야 기적이 일어나도 베드로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고 바라볼 때 자기가 영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바라보느냐? 나는 내 경건을 바라보고 믿음이 생겨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고, 물론 성령의 권능은 받았지만 그 권능을 바라보고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명령했을 때 바로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이다.


내가 실제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이다. 


그 이름이 낫게 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낫게 했다. 


바꿔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치셨다.


그런데 우리와 무슨 상관이라고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믿음에 초점을 맞추니까 자꾸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자기 은사에, 자기가 기도한 것에, 


자기의 기름부음에 초점을 맞추니까 자꾸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것은 치유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이러합니다.


모든 것에서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참 중요한 것입니다.


거룩에, 사랑에, 성자 같은 삶을 사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고아나 장애인이나 노숙자를 돌보는 사람들도 "나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고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했더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뿐만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사랑이 


나를 이렇게 하게 됐다." 이래서 고아들과 노숙자들을 돌보는 간증을 해도 


초점이 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야 되는데 


초점이 그 사람에게 가 있는 목사들이 한국에도 외국에도 많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왜 기적을 행하고 영광 받는 것만 위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이 주목받는 것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지요?


거룩한 삶을 살고 주목받는 것도 위험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주목받는 것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병 고쳤다 해서 영광 받는 것보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영광 받는 것이 


배나 더 위험합니다.


기적을 행하고 주목 받고 영광 받는 것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주목 받고 영광 받는 것이 일곱 배는 더 위험합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영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응용해 보세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믿음만 예수님께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도, 설교도, 거룩도, 사랑도,


기도도, 찬양도, 교회 부흥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목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쏙 빠져야 합니다.


"왜 나를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바꿔 말해서 이것은 은혜이다." 이것이 확실히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부터 말미암아 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참 조심해야 합니다. 병 고치고 교만해지고 


거룩한 삶을 살고 교만해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기도 많이 하고,


찬양을 멋들어지게 하고 교만해지고, 이래서 교만해지고 저래서 교만해지고


그것이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여기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응용해서 희한한 것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왜 치유에 있어서 굉장히 깊이 들어간 사람이 가끔 가다가 생뚱맞은 소리를 하느냐?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것을 분별 못할 사람이 아닌데, 왜 계시에, 말씀에 있어서


깊이 들어간 사람이 가끔 가다가 생뚱맞은 계시를 받고 엉뚱한 얘기를 하는지


아세요? 사람이 사랑하고 겸손하면 정확해져야 하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거룩한 사람이


왜 가끔 가다가 이상한 계시를 받고 잘못된 계시를 받고 생뚱맞은 소리를 해서


물의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지 아세요?


이것이 영적인 현실을 내막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왜 사람이 어느 정도 기도면 기도, 거룩이면 거룩, 사랑이면 사랑, 말씀이면 말씀,


신유면 신유, 계시나 입신이면 입신, 이론적으로 적어도 초보가 아니고


세계적으로 베스트들이고 이런 사람들이 가끔 가다가 생뚱맞은 응답을 받고


허튼소리를 하는지 아세요?


그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는 계시의 사람이고 


나는 능력의 사람이고 나는 거룩한 사람이고 나는 사랑의 사람이고 


희생적인 사람이고 나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이런 잘못된 자의식에서 나온 교만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지혜 있고 슬기 있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그것 때문에 교만해진 것을 말합니다.


교만은 숨겨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났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단순히 치유 능력이 강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말씀이 좋은 것이 아니고


단순히 예언이나 계시들이 깊이 들어간 것이 아니고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거룩한 삶을 살고 단순히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이것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자기 같은 사람을 써주시고 


자기 같은 사람도 변화시켜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감지덕지하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더 주님을 의지하고 더 주님께 달라붙고


더 낮아지고 더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더 기도하고 이래야 진짜 정확해지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단순히 말씀에서, 어떤 깊은 은사에서, 그 사람이 거룩하다고,


기도 많이 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상당수의 분별력들이 거기서 나오지만 결정적인 분별력은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하는 예언들은 다 맞았는데 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셨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거룩한데,


저 사람은 저렇게 사랑이 많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데, 성자 같은데 어떻게 저 사람이


이런 틀린 응답을 받을까? 어떻게 저 사람이 이런 것에 대해서 오류가 있지?


어떻게 저 사람이 이것을 분별 못하지?" 


그게 그 사람의 그런 장점들이 가져오는 교만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속입니다. 그것이 가져온 교만이 눈을 흐리고 귀를 흐려서


그런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



10층 빌딩을 지으려고 하면 10층 빌딩에 맞게 파고 내려가야 되고, 


100층 빌딩을 지으려면 100층 빌딩에 맞게 파고 내려가야 되는데,


무슨 신앙이 파고 내려가는 것이 없이 말씀만 자꾸 쌓아 올리고


은사만, 봉사만, 무슨 직분만 자꾸 쌓아 올리니까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명한 목사들이 무너져 내려 버리고, 믿었던 성도들이, 은사자들이


무너져 내려 버립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말씀에다 말씀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에다가 은사를, 기도에다가 기도를, 봉사에다가 봉사를, 직분에다가 직분을,


사역에다가 사역을 계속 더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계속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더 어린아이같이, 갓난아이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그 영은 더 갓난아이가 되어서 주니미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손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보는 것"(시 123:2)처럼,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그 영혼은 갓난아이같이 점점 순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는 것이 계속되어서 완전히 그 영이 


갓난아이같이 순전한 상태가 되어서 완전히 전폭적으로 전적으로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신앙의 출발부터 겸손으로 출발되는 것이고 신앙이 이렇게 겸손해짐으로써,


단순히 말씀 증가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자꾸 증가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주님의 은혜가 자꾸 증가되어서 자라는 것이 신앙 성숙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최고의 하나님의 사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던


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 1:27)라고 말했고


가장 위대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도 점점 낮아지고 점점 자기가 작아지고 


점점 겸손해지는 것처럼, 단순히 점점 말씀이 충만하고 점점 계시가 정확해지고


점점 기적을 행하고 사역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지고 겸손해져서 위해한 사도로서 일생을 마치고 보좌 앞에 섰을 때 


위대한 선지자로서 세계를 진동시키고 수많은 열매를 맺고 보좌 앞에 섰을 때, 


사도로 선지자로 서는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교회의 목사로 서는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유명한 강사로 서는 것이 아니고 무익한 종으로 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한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 


"주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그것도 할 지혜도 할 능력도 없는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시고 


무능한 자를 강하게 하셔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같은 것이 이렇게 쓰임 받은 


것이 특권입니다. 


이것이 저의 자랑이나 공로가 아니고 이것이 제가 주님을 섬겼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 같은 자가 이렇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주님, 이것은 특권이었습니다. 


주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저같이 아무것도 아닌 자를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열심을 주셔서 


사용하셔서 이런 열매를 맺게 된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전부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주여, 저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다 행했습니다. 다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착하고 추성된 종으로 놀랍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보좌 앞에 나아가서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 이것은 제게 합당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합당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최고의 예배가 그것입니다. 거문고 타고 경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최고의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로 쓰임 받은 자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람들이 볼 때 가장 놀라운 열매를 맺고 가장 거룩한 삶을 살고 가장 사랑이 충만하다고


희생적인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도했던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기적과 계시와 말씀에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자기가 무익한 종인 것을 알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모든 것이 진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자기의 영으로 100% 절감하고 느끼면서


주님 앞에 가서 면류관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서 일생 수고하고 헌신해서 받은 면류관을 내려놓으면서


"주님, 주님만이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만이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겸손으로 시작해서 겸손으로 진행이 되어서 겸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자들은 다 겸손한 자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 겸손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오만한 이단사냥꾼들이 귀가 막혀서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허튼 소리할지 모르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 겸손하지 않으면 목사든, 신자든,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일정 수준 이상 겸손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겸손하지 않는 자들은 넘어지고 타락하게 되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생명과 같이 귀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입니다.


누구를 승진시킬 것인가, 누구를 해고시킬 것인가?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입니다.


교만한 자는 낮추시고 교만한 자는 최악의 경우에는 사울처럼 해고시키고


겸손한 자를 다윗처럼 높이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시각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인류를, 사람을 보실 때 주님이 그 사람에게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말씀인가,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치유의 능력인가? 은사인가, 거룩인가? 심지어는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인가? 희생인가?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은, 주님께서 결국 보시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교만과 겸손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을 살피실 때, 결국 최종적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결정하시기 전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교만하냐, 겸손하냐? 그래서 제가 너무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지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전심으로 자기를 향한다는 것이 겸손하게 철두철미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눈은 그것을 보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눈에 발견되시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주님의 눈에 띄었던 것처럼 주님의 눈에 발견되시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 끌리는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은 싫고 어떤 유형의 사람은 좋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끌리십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참 진리가 있는데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습니다. 


거머리처럼 "다고 다고"하고 기도 많이 한다고 깊은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양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의 양이나 계시나 메세지나 체험의 양적 증가입니다.


양적 증가가 아니라 질적으로 깊이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기도 많이 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안수를 많이 받는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겸손에 비례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해질수록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욕심낸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머리처럼 "다고 다고" 하고 


보채고 기도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자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하시면 진짜로 아름답게 인생을 끝마치게 


되기를 원하시면 세계적인 대형 교회를 세우고 추하게 늙고, 세계적인 사역하고 


추하게 늙고 그렇게 되지 말고 신유 사역자들 중에 80%~90%가 종말이 좋지 않잖아요. 


그들 중 80%~90%가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었잖아요.


여러분의 종말이 아름답기를 원하시면


끊임없이 겸손을 배우기시 바랍니다.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세례 요한처럼, 바울처럼 끝마침이,


종말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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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승우 목사님의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 제 5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