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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입장과 말씀의 입장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7. 22. 22:22




나의 입장과 말씀의 입장


말은 정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대부분의 표현은 여러 가지로 쓰일 수 

있지만, 그것이 사용되는 특정한 상황에 의해 한 가지 구체적 의미로 고착

된다. 가령 "내가 쏜다"는 말은 모호하다. 하지만 사격연습장이나 식당과

같은 "정황"이 정해지면 그 말의 의미는 분명히 정해진다. "열쇄 세 개가

필요하다"는 말도 이사하는 날 아파트 관시실이냐 중매쟁이와의 면담이냐

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질 것이다. 


나이트 클럽에서 "물이 좋은" 것과 정수기 가게에서 "물이 좋은" 것이 같을

수 없고, 음식을 "씹는" 것과 여자 친구 문자를 "씹는" 것이 같을 수 없다.

표현 자체는 다양한 의미의 가능성이 있어 모호하지만, 거기에 구체적 상황

이 설정되면 많은 가능성 중 한 가지의 구체적 의미만이 선택되고, 나머지

가능성들은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혼란 없이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수업 시간에 "키보드가 고장 났다"고 말하면 다들 어리둥절해한다. 상황과 

연결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실에서 그 말을 했다거나("자판"),

찬양연습 시간에 그 말이 나왔다면("악기") 다들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물론 아주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가령, "키보드라는 이름이

붙은 물건 모두 다 가져와!") 두 가지 의미가 섞이는 일은 절대 없다. 한 가지

의미가 결정되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읽는 구절이 어떤 상황인가를 분명히 파악하는 

일이다.




정황 파악의 중요성



성경읽기에서 가장 흔한 실수가 바로 이 부분에서 일어난다. 문맥 혹은 정황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우리는 성경을 매우 "고분고분" 읽는다. 감히

"대들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잘 이해되지 않는 경우에도 따지기보단 "아멘"

을 외치며 그냥 넘어간다. 어른 말씀에 토를 다는 것도 버릇이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 말씀이랴? 물론 이렇게 해서 이해가 될 리 없다. 그래서 우리는 "대충"

어떤 뜻이려니 짐작한다. 그리고 그 짐작한 의미를 통해 "내 나름대로" 은혜를

받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한다.


문제는 막연한 이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열쇠 세 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 채 은혜 받기는 어렵다. 오히려 "무슨 뜻이지?" 할 뿐이다.

필자가 귀국 직후 "내가 쏠게"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 당황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막연한 표현을 즉시 구체적인 것으로 만든다. 거의 자동적으로 

그 표현에 가장 어울린다 싶은 상황을 추측하고, 그 상황에 비추어 그 표현을

"이해"한다. 이사를 생각하며 "현관 열쇠 세 벌"을 떠올리거나, 혹은 결혼을 

생각하며 "엄청난 혼수비용"을 걱정하거나 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넘겨짚는

다는 것이다. 옆 사람 전화를 어깨 너머로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것이다.


물론 나의 지레 짐작이 성경의 의도와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서

확보한 문맥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헛다리"일 공산이 크다. 특히 하나님과

우리처럼 입장과 사고방식의 차이가 심한 이들 간의 대화라면(사 55:8-9),

오해의 가능성은 더 크다. 내게 자연스런 의미가 하나님께도 자연스러울 

가능성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자체의 상황을 파악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면, 많은 경우 내게 자연스런 해석은 내 상황에 맞고 내게 편한

해석일 뿐인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때는 성경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

을 성경적 언어에 대입해 재활용한 것에 불과하다.


설교 강단이나 성경공부 모임, 그리고 매일 아침의 QT 책상에서 이런 아전

인수적 작업이 "적용""은혜"라는 명분하에 끊임없이 자행된다. 허나 성경을

빌미로 재생산된 자신의 생각을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르고, 거기서

생겨나는 자기만족에 아무리 은혜라는 거룩한 이름표를 붙여준들, 거기서

나를 바꿀 수 있는 초월적 힘을 기대할 수는 없다. 


많은 신자들이 말씀의 능력에 대해 내심 회의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는 성경이라는 거울에다 자신의 생각만을 끊임없이 비추어

내면서, 그 비추어진 생각의 무력함을 재확인하는 경험만 반복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 권연경 교수님의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