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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함

놀라운 주의 사랑 2019. 3. 25. 21:24

 

 

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함

 

 

한편 조상 야곱의 우물에 매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가 생수를 약속한다

(요 4:10). 여인은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얻어 잘 살고 있는데, 길 가는 

나그네가 물 한 모금 달라고 하더니, 정작 자기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준다고

한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래 세상에 사람으

로서 순전히 물리적인 관점에서 대답한다(오해). 시내 언약의 은혜로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은혜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여인이 말하는 야곱의 우물을 이해하려면 우선 중동 사막지역의 오아시스를

생각해야 한다. 사막 지역에서 오아시스는 한 부족의 생명을 지탱한다.

야곱의 자손들(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야곱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은 그 조상 야곱이 준 우물, 곧 오아시스에서 물을 공급

받아 농사도 하고 목축도 하며 살아 온 것이다. 여기서 야곱의 우물은 더 깊은

의미로 시내 언약 체계, 즉 율법의 언약 체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네 부족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 야곱에게 주신 언약 - 시내

언약으로 표현된 언약 - 에 의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야곱의 우물은 결국 목마르게 한다고 말씀한다.

지금까지 거기서 농사 짓고 목축도 하고 식수를 얻었을지라도, 즉 시내 언약

체계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했을지라도, 그 조상에게 주어진 언약은

다시 목마르게 할 뿐이지,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 혼인 잔치와 같다. 거기에는 진정한 종말의 구원이 

없다. 목마름의 진정한 해소가 없다. 예수께서 주는 물은 영생을 주는 성령을

말한다. 구원사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는 시내 언약의 종말론적 완성을 가져

왔다. 종말에는 성령이 물같이 퍼부어지리라 보았는데(요엘 3:1-5), 예수는

위의 세상의 영을 이 아래 육신의 세상에 가져와서, 진짜 삶, 신적 삶을 살게

할 것을 약속한다. 예수 자신이 주는 물은 물리적 의미의 물이 아니고 초월에

서 오는 성령을 의미하는데, 그 물은 다시 목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곧 신적 생명을 얻게 하는 성령을 두고 하는 말이다. 4장의 강조가 바로 이것

이다. 

 

이 본문을 통해 예수의 상담 원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줄 모르고 문자적으로,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들이다.

요한은 그런 의도로 본문을 기록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상담'한 것이 아니다. 이른 바 성경적 상담을 한답시고,

성경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피상적으로, 그리고 작위적으로 꿰맞추어

'성경적 원리들'을 구성하려고 하는 행위는 오히려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결과를 빈번하게 낳는다. 성경은 상담 교과서도 아니고,

경제학 교과서도 아니며, 물론 천문학이나 물리학 교과서도 아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책이다. 케뤼그마의

책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과 어떻게 관계하시는지를 깊이 터득

하여, 성경적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등을 확립하고, 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일반 계시와 은총에 힘입어 얻은 통찰력(심리학적인 것이든, 사회학적인 것

이든, 물리학적인 것이든)을 조명하여 성경적 상담 원리를 발견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깊은 신학적 사고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제반 과학의 통찰력을 성경적 관점에서 또는 신학적

으로 비판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 구절을 작위적으로 짜 맞추어 성경적 상담, 성경적 교육,

성경적 경제 등의 원리들을 세운다고 주장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주기 보다는 그 반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께서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 여인을 어떻게 '상담'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예수가 성전 중심의 시내 언약 체결을 완성하여 심지어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이제 하나님을 모조품적으로가 아니라 실체적으로 알고

예배하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시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신학 전체에 대한 성숙한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2장 잔치의 표정은 예수께서 구약 또는 시내 언약을 종말론

적으로 완성하여 구원을 가져왔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서의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성전을 완성함으로써 종말의 구원을 가져

왔다. 이래서 시내 언약 체계의 최고봉 니고데모도(3장), 시내 언약 체계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도(4장) 모두 위에서 온 하나님의 은혜

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다. 이 기쁜 소식은 심판과 구원이란 양면을 지닌다. 유대교, 플라톤

철학, 사마리아교 모두 구원이 없다. 그런 것들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구리뱀을 쳐다보지 않고

아래에서 자기 꾀로 이리저리 뱀을 피해보려다가 죽은 것과 같다.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구원의 방도, 곧 십자가에 들려 올려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 - 과학과 기술 - 를 개발하여 인간의

문제들을 다 해결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니고데모 같이

학문이나 종교심 또는 도덕심을 갈고 닦아 구원을 얻으려하거나, 사마리아

여인 같이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조상 야곱이 준 우물)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2-4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재적 자원들을 동원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위에서 오는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위, 곧 하나님의 초월에서 오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

스도가 이 아래 세상에 없던 구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알아 영생을 얻을 수 있다. 

 

 

 

 

 

- 김세윤 교수님의 [요한복음 강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