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은혜 ♡ 글

마음의 변화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7. 8. 22:02

 

 

 

 

 

마음의 변화

 

 

 

그러면 회개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회개"로 번역된 헬라어는 metanoeo인데, 이 단어는 "변화시키다"라는 의미의

meta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nous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회개란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 및

사고 과정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해드리는

열쇠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로마서 12:2 참조)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솔로몬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언 23:7)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우리가 자신을 어떠하다고 생각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것을 생각하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의 됨됨이는

우리가 하는 생각의 결과입니다. 

 

회개는 생각의 변화입니다. 회개는 단지 나의 죄에 대해 나쁘게 느끼거나

하나님에 대하여 좋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는 눈물이 회개의 믿을만한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 죄, 실패에 대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자기의 생각은

바꾸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고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는 좋아 보이고, 좋게 들리고, 좋게 느껴집니다. 사실 유혹은 매력적인

데가 있습니다. 매력적이지 않다면 유혹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죄를 싫어

한다면 죄와 관련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문제는 내가 죄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범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그것을 즐기거나,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길을 제공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그 죄에 대해 후회하거나 슬퍼할 수도

있지만, 내가 범한 모든 죄는 범할 그 당시에는 좋아 보였고 좋게 느껴졌기

때문에 범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원했기 때문에 범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위해서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감정이나 느낌의 변화가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매력적

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죄에

대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죄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는 회개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한편,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죄에 대한 마음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회개를 했습니다.

 

어느 대학에서 일주일간 열린 전도 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집회는 어느 기독교 단체의 후원으로 열렸습니다. 거기서 나는

한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저녁 늦게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고 관심도 있어 보였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으며,

결단을 내리기 전에 정직하게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 나는 그가 참석했기를 바랐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저녁 집회에는 그가 일찍 도착하여 내게 와서는, 내가 말해 

준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자기의 모든 삶을 기꺼이 예수님께 

굴복시키며 맡기고자 하는 마음이 자기에게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솔직하고 또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따르는 것들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깊이 생각해 본 데 대해 감사를 표하고, 다시 한 번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그날 저녁 늦게 그의 방으로 찾아가기로 약속

했습니다.

 

커피를 들면서 나는 그의 솔직한 태도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따른

대가를 현실적으로 고려해 본 그의 태도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데 따르는 대가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따져 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자정이 훨씬 지난 어느

무렵 그는 "좋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전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전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현실적이고 냉철한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지금부터 자기 삶을 하나님께 넘겨드리겠다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그의 

결단이 얼마나 진실한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감정이 없는 것 같고 너무도 이성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 학생은

자기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마음을 바꾸었으며,

하나님께 자기 삶에서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권리를 내드렸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으며, 그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자기는 살아갈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한 마음을 바꾸었고, 그 죄를 그리스도께

고백하였으며, 십자가에서 그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거기에 감정은 거의 수반되지 않은 듯 보였지만, 태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듬해 그는 그 모임을 후원했던 기독교 단체의 그 대학 책임자로 뽑혔습니다.

얼마 후면 그는 성서대학을 졸업하고 전임 사역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는

등의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지는 않았으나, 그것에 대한 자기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마음의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를 전파할 때 마음의 변화에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몇 가지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1. "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서 세례를 받더니"(마태복음 3:6).

죄를 자복하는 것에는 자기가 지은 죄의 이름을 말하며,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며,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포함

됩니다. 

 

회개가 하나님과 나 자신, 그리고 죄에 대한 일반적인 마음의 태도의 변화이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죄를 직시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한다면 왜 거짓말을 합니까? 무엇을 숨기고자 합니까? 어떤 영역

에서 당신은 직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야고보는 "너희 죄를 고하라"(야고보서

5:16 참조)고 권면합니다. 죄를 찾아내어 자백하지 않으면 육체적, 정신적,

영적 장애를 초래합니다. 자백은 용서를 받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치료 효과도 있습니다.

 

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누가복음 3:8). 회개는 반드시 변화된 행동

양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세 그룹의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무리와 세리들과 군병들이었습니다. 요한은 회개가 표현되어야

할 영역으로 대인 관계와 직장 생활과 돈, 이렇게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1) 대인 관계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누가복음 3:10-1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진정한 

태도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성경은 심판 날에

그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에 대해 심문받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행동은 항상 다른 사람들, 특히 그들보다 사회적으로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선행들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삶의 변화로 표현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들이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하여

예배된 나라(34절)를 상속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선행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35-36).

 

임금은 염소들에게는 위와 정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5:41-43).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진정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나타나며, 우리의 회개의 진실성도 거기

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물어오면

나는 그들의 행동 양식에서 그 진정한 증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일서와 야고보서에서 이 사실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첨가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기본적인 표현입니다.

 

 

(2) 직장 생활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누가복음

3:12-13). 회개의 증거는 직장 생활에서의 정직과 온전성입니다.

세금을 거두는 일은 악용의 소지가 많았습니다. 세리들은 세금 내는 

사람들을 착취할 수가 있었고, 대개 그렇게 했습니다. 착취하기가 너무나

쉬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으레 그렇게 할 줄로 알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라는 한 세리를 다루실 때 삭개오가 나타낸 첫 반응은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누가복음 19:8)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9절)고 하신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삭개오의 구원의 증거는 그의 변화된 태도였습니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에 많이 있던 종들에게 상전들을 섬기되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에베소서 6:7)고 권면했습니다.

이 말은 노예 제도를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예의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

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친 것입니다.

 

 

(3) 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아까'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强暴)하지 말며 무소(誣訴)하지 말고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누가복음 3:14).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속여 빼앗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즉 사람들

을 대하는 면과 직업상의 정직에 대해 다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돈과 재물에 대한 교훈을 덧붙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디모데전서 6:10-11)라고 권면합니다. 돈은 매우

쓸모 있는 종인 반면, 흉악한 주인이기도 합니다.

 

젊은 부자 관원은 자기 돈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았던 까닭에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 젊은 부자 관원과의 대화에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마가복음 10:2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을 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알면 큰 만족을 느끼게 되며, 회개한 사람은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급과 우리의 만족 등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를 살펴보려면 따로 한 장 전체를 할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만 회개한 자는 만족할 줄 아는 자라는 사실만을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다룬 것은 회개의 열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회개로 말미암은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우리로 바른 믿음과 바른 교리를 갖도록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바른 믿음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양식을 계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은 단지 목표에 이르는 수단입니다. 믿음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목표는 우리의 삶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으로 드러날 것이며, 심판 날에 

"나무나 풀이나 짚"(고린도전서 3:12) 가운데 있게 되어 타버릴 것입니다.

 

 

 

 

 

- 찰스 프라이스 목사님의 [진정한 그리스도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