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은혜 ♡ 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5. 6. 20:20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우리는 영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외모와 인상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항상 올바른 인상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개성을 억압하는 것아 아닙

니다. 이 점 역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개중에는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과 의견을 같이 하기는 하되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여 자기 개성을 억압할 필요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실례 하나를 들어야만 설명이 될 유형의 주제는 [아라비아의 로멘스]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의 개성을 억누르기 위해 자기 이름까지 

바꾸어 영국 공군의 평범한 병사가 된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자전거 사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사실과, 그가 겸손과 자기 희생의

모범인으로 얼마나 찬양을 받았는가를 회상하실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다는 것을 이런 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이름을 바꾸고 여러분 자신

을 거짓되게 십자가에 못 박거나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철저할 정도로 비성경적이며, 전혀 비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형의 행동이 세상에 감명을 주는 일이 많고 기독교인들에게도

감명을 주는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놀랍게 겸손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큰 희생을 하는 사람이라거나

승려들처럼 생활의 어려움과 책임을 벗어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교묘한 유혹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하기' 위해 삶의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름만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심령이 가난한' 것은 위대한 학자들의 겸손을 논할 때와

같은 의미의 겸손도 아닙니다. 대체로 말해서 참으로 위대한 사상가는 겸손

합니다. '위험한 것'은 바로 '눈곱만한 지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이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 이유는 그 겸손이 지식에 광대함

을 의식한 데서 산출된 것이며, 따라서 성경적인 의미의 '영의 겸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이 부정적인 면들이라고 하면, '심령이 가난한' 것의 긍정적인

면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최상의 대답을 성경 말씀에서 가져

온다면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

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것이 겸손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 끝없이 많은 실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드온과 같은 사람의 영입니다. 주님께서 해야 할 큰 일을 그에게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셨을 때 그는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삿 6:15)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과 같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음을 깊이 느끼고 자신의 부족과 부적격을 의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윗에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여, 내가 누구이기에 당신이

제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일이 그에게는 믿어지지가 않았고

그 일로 매우 놀랐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사야에게서도 보게 됩니다. 환상을 본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6)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와 같은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생래

적으로 공격형이요, 자기 주장적이요, 자신감으로 가득하고 자신을 믿는 현대의

전형적인 세속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님을 볼 때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에게 찬사를 바칠 때의 그를 보십시오(벧후 3:15, 16). 하지만 동시에 그는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약하거나 약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고유의 개성은 변함없이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심령이' 가난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에게서도 찾아 봅시다. 그는 큰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서신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그의 생애 끝까지 싸워야 했던 싸움은 자만에 대항하는 싸움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자랑'이란 말을 그가 계속 사용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 였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에 부치는 편지(3장)에서 육체를 신뢰하는 일에 대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경쟁의 문제라면 그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다고 했습

니다. 그런 다음 그가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난 후로 그는 모든 것을

'해(손실)'로 여겼습니다. 이같은 능력을 소유했던 그가 고린도에 나타났을 때에는

제가 이미 상기시킨 바와 같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기까지"(고전 2:3)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후에도 여전했습니다. 바울은 전도의 임무를 계속할 때에

"이런 일들에 자격 있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만일 어느 누구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권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령이 가난했으므로'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것을 우리 주님의 생애에서 보게 됩니다. 그는

사람이 되셨고, '죄인인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

하셨지만 신성의 대권을 쥐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여기 땅 위에

계시는 동안 사람처럼 사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고도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에게 절대 의존한다."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 생활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의 가난한 영과 하나님께 의뢰한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그가 기도하시는 것을 살펴 보고 그가 기도로 보낸 시간을

살필 때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만심이 없으며 자신과 자기

의존이 완전히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에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이 엄청난 인식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산상설교 /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