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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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현실, 그리고 결단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5. 27. 20:15




복음과 현실, 그리고 결단




복음은 삶의 이야기이기에, 우리 일상은 복음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재료가

된다. 하지만 앨리스의 나라가 "이상한" 것처럼, 복음이 그려내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 일상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처럼 비틀리고 뒤집어진다.


하지만 비틀린 세계 속의 비틀림은, 그 비틀림을 원형으로 회복하려는 몸

놀림일 수 있다. 이처럼 복음이 드러내는 역전과 비틀림은 실상 이미 뒤집어

지고 비틀린 우리들의 세계를 "바로잡는"(rectifying) 하나님의 움직임이다.

이것이 바로 "의롭게 하다"(justify)는 말이 품고 있는 의미의 한 가닥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의 현재의 일상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 은혜가

야기하는 역전과 굴곡의 부담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란 비유 속의 둘째

아들처럼 감격하며 받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같은 이야기 속의 큰 아들처럼 

거품을 물며 거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늦게 들어온 사람에게 주어진 한 달란트처럼 감지덕지 받으며 감격할 수도

있지만, 하루 종일 고생한 사람에게 주어진 한 달란트처럼 불평 외엔 할 말이

없는 경험일 수도 있다. 


제자들처럼 감격하며 예수의 뒤를 따를 수도 있지만,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그를 떠날 수도 있다. "호산나!" 외치며 환호할 수도 있고, 며칠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지를 수도 있다. 


천상의 복음, 은총의 복음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혹은 우리에게 편리한 일상의

논리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와 다르지 않은 세계,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세계가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역전과 굴곡이 없는 곳에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우리의 오늘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나의 좁은 세계를 사랑하며 천국을

"이상하다" 비난할 것인가, 혹은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진 채, 

비틀린 나의 현실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은혜에 발을 맞출 것인가? 


토끼가 중얼거리며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드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정상적인" 세상 속에서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는" 책을 읽는

언니가 될 것인가? 


복음은 어느 게그우먼의 초대처럼, 이런 이상한 나라로 우리를 부른다. "따라와!"

못내 아쉬워 미적거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목청을 높인다. "어서 와!"

(잠 8:1)



- 권연경 교수님의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