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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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의 교범이요, 유일한 자료요, 유일한 권위입니다!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4. 30. 21:01




무릇 어떤 교훈을 검토할 때에는 포괄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방법이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는 우선 산상설교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질문과 함께 기독교

의 생활, 사상, 견해 등에서 차지하는 이 설교의 위치에 관해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맨 처음 해야 할 질문은 "왜 우리는 산상설교를

검토해야 하고, 왜 그 가르침으로 이끌어야만 하는가?"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메시지'를 주신 줄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설교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도하심과 인도하심을 

앙망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설교하고 해석하려는 사람의 임무인 줄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산상보훈을 가지고 설교하게 된 주된 이유는,

성령의 권고와 강요하심과 인도하심을 감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만약 저의 선택에만 맡겨져 있었다면 

저는 산상보훈 설교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강한 이끌림에 의하여 산상설교를 택한 또 다른 특별한 이유는 오늘날 교회

의 특수상황 때문입니다. 교회사를 읽고, 성령운동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고,

모든 시대에 있어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유익한 일

입니다. 이런 배경 아래 현재의 교회 상태를 고찰해 볼 때 오늘날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천박성이라는 달갑지 않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복음전도 활동을 과거의 교회들이 실현했던 위대한 복음전도

노력과 비교해 볼 때, 요란스러우며 경악할만한 끔찍스러운 수단의 사용

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천박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천박성이

오늘날 교회의 성결개념과 성화론에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스스로 말씀하시도록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또한 극(極)에서 극으로 치닫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고질적인 성향마저

가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교범이요, 유일한 자료요, 유일한 권위입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자연(때로는 신비체험)으로부터 여러가지의 추론을

연역함으로써 창조주에 대한 신앙에 도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만이 절대 권위라는 점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동의하는 바이며, 오랜

교회사를 일관하여 전통적으로 지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관적 체험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것은 선한 영도 있지만 악한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짜 체험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권위는

오직 성경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이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 그것만 가지고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무작정

기계적인 방법으로 읽어서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매일 읽기 위한 목적

으로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면 아무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계획을 

우고 성경을 읽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계획을 실천할 

때에 그 날의 분량을 읽은 다음, 생각이나 묵상도 하지 않고 무조건 다음

분량을 읽어 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 자체가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 관해 사도 베드로가 한

유명한 논평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들은 바울서신을 읽기는 했지만 그것을 왜곡시켜 자신의

멸망을 초래했습니다. 


바울서신을 쉽게 읽을 수는 있으나 읽은 후에 지혜가 전보다 더 나아지기는

커녕 그것을 왜곡시킴으로써 파멸을 자초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는 성경

전반에 관해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잘못의 가장 통상적인 원인이,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하나의 선입적

이론(理論)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론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는 방법에 대단히 익숙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대는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단들도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이단들은 결코 부정직한 사람들이 아니

었습니다. 그저 판단을 그르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볼 때, 일부러 잘못

을 행하기 위하여, 또 잘못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선 사람들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이미 알고 있는 가장 신실한 사람들 가운데 있었

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하나의 이론(理論)을 발전

시켜 그것에 꽤 만족을 느끼고, 그리고 나서는 그 이론을 가지고 성경에 임하

게 되었으며,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그 이론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성구(聖句)의 반만 읽고, 또 다른 곳에서 어떤 성구의 

반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여러분의 이론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의 이론, 선입관념과 자신의 애용관념(愛用觀念)을 가지고 성경에 임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순간 어떤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면은 과소평가하는 유혹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주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다루게 될 경우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그 영광스러운 자유와 함께 한 가지 측면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낱 도덕률의 집합쯤으로 변형시키고

맙니다. 복음이 그들에게는 온통 율법이 되므로 은혜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

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생활을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할 그 무엇이라

고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전히 율법주의가 되며 그 속에 은혜는 사실상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을 희생하고 은혜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신약성경의 복음이라 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한 가지 고전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

니다.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이같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은혜를 크게 강조한 것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자주 오해를 받았습

니다.


여러분은 로마서 6장에서, 로마와 기타 지역의 일부 사람들이 도출해 낸 억지

추론(推論)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은혜를 더하기 위해 악을 행하자. 그의 가르침은 악을 행하자는

결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훨씬 많았

다고 말해왔지 않는가. 옳거니! 그러니 은혜를 더하기 위하여 죄를 계속 짓자."

이에 바울은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지금도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으므로 율법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율법을 잊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이제 우리에게 심판이나 정죄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의 주장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유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셨으며 율법대로 사셨습니다. 


산상설교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의는 서기관(율법학자)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일점일획은 모두 성취되고 온전해져야 합니다. 이 점을 망각했기 때문에

율법과 은혜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오류가 종종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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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산상설교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