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3

[사랑 받고 사랑하는 사람!]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비결!

놀라운 주의 사랑 2017. 1. 21. 00:02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비결!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이것을 보고 평가하십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인정과 평가는

그 점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합니다. 

'나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 답을 알고 싶으시지요?


지금부터 저는 사랑에 대해 아껴두었던 가장 중요한

진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사랑을 낳는데, 

하나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느끼고 확신하며 자란 아이들은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반면에 자랄 때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아이들은 부모라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확신하고 누려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회개치 않으면 지옥간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말만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엡 3:18)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데릭 프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테레사 수녀의 종교적 신조를 모두 지지하지는

않지만, 테레사 수녀가 진단한 인류의 근본 문제는

동의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최악의 질병이라는

점이다. 요한 일서 4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얼마나 심오한 진리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사랑을 일깨우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이는 사람들 간의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누군가의 사랑에 의해 우리 안의 사랑이 일깨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할 줄 모른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 거절의 상처로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도 남을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 속의 사랑이 한 번도 일깨워

진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할 줄 모른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에베소서 3:18)



이것은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여기서 '넘치는'

라고 번역한 '휘페르발로'의 분사형 '휘페르발루산'

'뛰어넘는', '초월하는'이라는 뜻입니다(참조 1:19, 2:7).


그러므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NRSV: 'the love

of Christ that surpasses knowledge')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극히 크고 위대해서

아무도 그것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초월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 객관적인 방법 - 복음을 통해서!




제 마음을 울리는 복음송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네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네

구세주의 사랑 이야기

영광스런 천국 떠난 사랑

나와 같은 죄인 구하려

주님의 그 사랑은 정말 놀랍네

놀랍네 놀랍네 오!

주님의 그 사랑은 정말 놀랍네

나를 위한 그 사랑


넓고 넓은 우주 속에 있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구원받고 보호받은 이 몸

주의 사랑 받고 산다네

주님의 그 사랑은 정말 놀랍네

놀랍네 놀랍네 오!

주님의 그 사랑은 정말 놀랍네

나를 위한 그 사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주님의 그 사랑은 정말 놀랍네

놀랍네 놀랍네 오!

주님의 그 사랑은 정말 놀랍네

나를 위한 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와 십자가를 통해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명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10)




존 스토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속에서

지고의 형태로 계시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존 라일 감독이 쓴 [거룩]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분별없고 경건치 못한 영국인 여행자가 북 아메리카의

인디언 개종자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를 중요하게 여기며,

그분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했기에 당신은

그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인디언 개종자는 그에게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낙엽과 이끼를 모아 원을 만들고 살아 있는 벌레를

한 마리 잡아서 그 안에 놓았다. 그는 낙엽과 이끼에 

불을 붙였다. 곧 불의 열기가 벌레를 그슬렀다. 

벌레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사방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마침내 벌레는 절망하여 죽은 

듯이 한가운데 까부라졌다.


그때 인디언은 손을 내밀어 그 벌레를 집어 올리더니

자기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영국인에게 말하기를

'여보시오 당신은 이 벌레를 보고 있습니까? 나는 이 

벌레처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죄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으며, 영원한 지옥 가장자리에 소망 없이 서 있었습

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팔을 내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의 손으로 나를 구해주셨으며

영원한 지옥 불에서 꺼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되고 불쌍한 벌레인 나를 자기의 사랑의 마음 

가까이에 두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테핀

스말리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랑(이것이 '은혜'의 의미다.)

우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먼저 왔다. 그 결과로서,

그리고 응답으로서 사람은 사랑하는 피조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즈는 많은 진지한 신앙인들이 느끼는

고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약하고 미미하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여러분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함을 여러분은 느끼고

계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궁극적 시금석이 됨을

여러분에게 다시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성도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점점 커간 것을 발견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째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원인은 우리가 죄의

성격과 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사랑과 그 사랑의 크기를 이해하기 시작

할 때는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가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독생자를

아끼시지 않은 것을 깨달을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으면

죄론을 파악하십시오. 그리고 죄론의 의미가 그분에게

어떤 것이며, 그분이 그것에 대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깨달을 때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이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신성함'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36~47절에 보면 이것의 한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과

옥합을 깨트린 죄인인 여인이 나옵니다.


그런데 둘 중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옥합을 깨트린 여인입니다. 그럼 왜 이 여인은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

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여인은 마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나오는 세리처럼 죄인이고 자기 죄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습

니다.


바울도 전에 박해자였기 때문에 자신을 죄인 중에 

대괴수로 여겼습니다(딤전 1:15).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비결이 나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얼마나 많고 큰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그런 자신을

위해 죽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의 크기와 깊이를 통해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깨닫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사랑 받고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