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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

놀라운 주의 사랑 2022. 8. 21. 22:35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13장 1-7의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고린도, 데살로니가, 갈라디아, 

에베소, 골로새, 라오디게아, 마게도냐 등 여러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직접 교회를 설립하거나, 설립할 수 

있는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모든 교회들 중에서 바울 

직접 세운 교회 중에 하나는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은사와 능력이

뛰어나고 활성화 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은사와 능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에 안에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근심하고 가슴아파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야기되었던 문제들은, 성도들의 

성적 부도덕한 삶과 공동체 내 파당 간의 싸움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교회의 연합을 

깨트리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공동체 내 파당 

간의 싸움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허무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해결책을 편지로 써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제시한 교회의 연합을 깨트리는, 

공동체 내 파당 간의 싸움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먼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라고 말하면서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방안으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말씀’을 제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제시한 이 사랑만이 공동체 내 파당 간의 

싸움을 막을 수 있고, 이 사랑만이 교회의 연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 바울에 제시한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우리 주 예수님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저는 오늘 특별이 이 ‘사랑의 말씀’ 중에서 교회의 

연합을 이루는데 필요한 사랑에 대해서 몇가지만 

알아보고자 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진리에 기초한 사랑........

 

 

 

 

첫째,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진리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3장 6절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때, 기초가 바로 

세워지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기초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결국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약 불의를 행하면서 

사랑을 하거나, 진리를 기뻐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먼저 진리에 

기초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부정과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침묵하면서 그에게 그 잘못을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그의 허물을 감싸고 덮어주어서 그가 계속 그런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에 가게 하는 것... 이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진리에 기초한 사랑을 한다면, 그의 잘못에

대해 말해줄 것이고,(사랑과 온유함으로요) 또 회개할 수 

있는 말씀과 길을 알려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진짜 

사랑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교회, 변승우 담임목사님의 저서 [미혹]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에 무관심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 중 다수가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면 왜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은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돈, 명예, 권세! 술, 여행, 

노는 것 이런 것들을 좋아하니까 심각한 것을 싫어하고

진리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불의를 좋아하면서도 자신은 

사랑한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이 없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우리 믿는 자들은 항상 이 진리에 기초한 사랑을 해야

겠습니다. 먼저 이러한 성경적인 진리에 기초한 사랑

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기뻐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연합을 이루는데에 있어서도 기초가 되고 

가장 중요한 사랑일 것입니다.

 

 

 

 

서로 시기하지 않는 섬기는 사랑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사랑은, 서로 시기하지 

않고 섬기는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 13장 4절에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그 모임이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것 

중에, 가장 비중이 크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시기심입니다. 

어느 공동체 안에, 누구든지 시기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공동체는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시기하는 마음을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왜 파당 간의 싸움이 일어났을 까요? 

그것은 서로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들을 두고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따르는 아볼로가 더 우월하다! 아니야, 

내가 따르는 바울이 더 우월하다!”라며 서로 시기하며 

당을 짓고 싸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3) 

 

그 마음에 시기심이 있으면 성숙한 신자가 아니라, 아직도 

어린 신자,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시기심을 갖고 

분쟁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도 사도 바울은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도 

바로 시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끼리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서로에 대한 

시기심을 제거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에서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신의 아들들을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 본 제자들은 

시기심으로 인하여 분개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6-28)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원어로 보면 ‘디아코노스’인데, 이 뜻은 시종인, 시종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시기심으로 

가득해서 ‘누가 크냐?’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서로 시중드는 

시종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서로에게 

시종드는 심부름꾼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시기심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섬김’

이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섬기되 시종드는 사람, 심부름꾼

처럼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시기심이 사라지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며 

공동체의 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하여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사랑은, 서로에 대하여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 13장 4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가 되려면 앞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진리에 

기초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시기하지 않고 

섬기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시적인 사랑', '일시적인 연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연합이 깨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기 원한다면,

반드시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랑입니다. 역으로 

오래 참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또 그 인간들을 구원 하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구주 예수님의 사랑도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성령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사랑도 오래 참는 사랑이지요?

 

이처럼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교회, 김옥경 협동목사님의 저서 

[영광에서 영광으로]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받으신 수치와 고통을, 어떻게 

오래 참고 견디셨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나를 때렸어.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렸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그들은 나를 때렸어. 나의 살이 

찢어지고, 혈관이 터지고, 신경이 손상되기까지... 

그들은 나를 때리고 또 때렸어. 나중에는 감각이 없어

지고 아픔을 느낄 수도 없었어. 그렇게 육체의 통증은

멀어졌어도, 수치감과 모욕감이 나를 더 아프게 했어.

그들은 발로 걷어차고 또 걷어찼어. 더러운 침을 뱉고

수치스런 욕설과 저주로 나를 짓밟았어. 나를 더럽히고

또 더럽혔어. 나는 그때 개보다 못하고 벌레보다 못했어.

마치 벌레처럼 짓뭉개지고 처참하게 짓이겨져질 수밖에

없었어. 내가 무엇을 했기에, 무엇을 행했다고, 무슨

잘못이 내게 있다고... 저들은 제정신을 잃고 미친 사람

들처럼 나를 향하여 분노와 저주와 사악을 토해 냈어.

나는 변명도 해명도 하지 못하고 도망칠 수도 없이 

그저 저들 앞에 잠잠히 버려져 있어야 했어. 너희의

허물과 죄가 얼마나 크고 중하여 그 형벌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알기에 피할 수가 없었어.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또 자신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사랑도 오래 참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예수님처럼 서로에 대하여 오래 

참으며 사랑한다면, 그 누구도, 원수 마귀도 교회의 

연합을 절대로 깰 수 없을 것입니다. 연합을 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연합은 영원히 지속될 것 

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 예수님께서 “잘 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신부들아!”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

 

 

 

말씀을 맺겠습니다.

 

 

김세윤 교수님의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교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구체적

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아주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도 이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사랑이 너무 중요하고, 우리 가정을 위해서도 사랑이 

너무 중요하고, 교회, 직장, 사회, 나라에 있어서도 

사랑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의 주제처럼 참된 연합을 위해서는 

더더욱 사랑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또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예수님이 본을 보여 주신 사랑으로 사랑하며 연합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1)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는, 

진리에 기초한 사랑을 하고

2) 서로 시기하지 않고 섬기는 사랑을 하고

3) 서로에 대하여 오래 참는 사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 밭에 새기고 철저하게 지켜 행한다면 

그 누구도, 원수 마귀도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연합을 

깰 수 없을 것이, 이런 교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충만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가 

충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함으로 우리의

공동체, 교회 안에서 참된 연합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