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찰스 G. 피니 글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은 율법과 복음에 어긋나는 일이 됩니다!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11. 2. 16:44




(1)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관심사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본을 

    따른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과 같지 않게 되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밖의 모든 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들, 예를 들면 공의, 자비 등은 하나님의 사랑의 변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비, 선한 의지, 또는

이웃의 행복을 바라는 것 등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들의 성품을 인정하거나 거기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므로 행복하게 될 수 있는 될 수 있는 모든 존재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또 하나님은 모든 거룩한 존재들에게 사랑을 

발휘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유익에 관심을 두시듯이 모든 존재들의 유익에도

그것들의 상대적인 가치에 따라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복이나

영광을 지고의 선으로서 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고의 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존재이신 하나님의 행복의 총체는 모든 다른 존재나 모든 유한한 피조물의 

총체보다 큽니다. 


비슷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짐승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과 함께 강에 빠졌

습니다. 이 사람이 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물에 빠져 죽는다면 그것이

과연 참된 사랑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은 

죽더라도 내버려두고 먼저 자신을 구하는 것이 공평한 사랑일 것입니다.

이는 그의 행복이 말의 행복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차이는 사람과 말, 또는 높은 천사와 비천한 곤충의

차이보다 큽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행복을 정확히 그것들의 참된 가치에 따라

고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똑같이 행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행복과

영광을 고려해야 합니다. 즉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지고의

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행복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더 원한다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닮지 않은 것입니다.




(2) 자기의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은 참 기독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반대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갖지 않으면 그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주님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고 거듭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추구하셨습니까? 주님 자신의 구원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추구하신 것은 인간의 구원을 통한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우주의 유익이었습니다. 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순전한 사랑,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 놓인

기쁨입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버려 인류의 구원을 애쓰시고 고난당하심으로써 주님은 위대한

선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3)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반대됩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것을 보다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율법의 개요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된 큰 일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행복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한히 사랑스럽고 바람직하며 지고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복은 이미 확보되었으므로 그것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는 반론을 폅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왕은 전혀 나와 관계가 없으며 그의 행복은 내가 없이도

확보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잘되고 행복하기를 바랄 내 의무가 조금이라도

줄어듭니까?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도 스스로 행복하시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그분의 행복을 사랑하고 그것을 즐거워해서는 안 될 

이유가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하나님을 만족하시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자신에게 사랑과 선의를 베풀듯이 이웃에게 사랑과 선한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고 명합니다. 즉 우리 자신의 유익과 이웃의 유익을

각기 그 상대적인 그 가치에 따라 추구하라고 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의 개요는 하나님께 사랑을 발휘하고,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의

상대적 가치에 따라 사랑을 베풀며, 모든 거룩한 것에서 만족을 느끼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려하거나 그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문자 및 정신에 반대됩니다.




(4) 자기의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고 했습니다. 


사랑이 참된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처럼 강력하게 표현했습니다. 참 사랑이 없는 사람은 무가치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참 사랑의 특성들을 밝힙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여기에서 사랑의 주요 특성 중의 하나를 찾아 볼 수 있으니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만일 이것이 참 신앙이며 이것 없이

참 신앙이 있을 수 없다면, 참 신앙의 특성 중 하나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석 성경에서 이러한 인용문들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동일한 사실을

가르치는 많은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중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마 10:39).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의 유익을 최고의 목표로 삼으면 자기의 유익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 통치의 확정된 원리로 제시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서도 동일한 것을 가르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여기에서 "유익" "행복"

"번영" 또는 "부"라는 단어로 바꾸어 써도 괜찮을 것입니다. 또 10장 33절

에서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은 율법과 복음에

어긋나는 일이 됩니다.




- 찰스 G. 피니의 [순종의 기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