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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천국의 도서관 ▤/사랑 ♡ 글

우리의 깨달음은 순종으로 나아간다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6. 11. 01:13




우리의 깨달음은 순종으로 나아간다



남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남의 글을 대충 읽으려는 경향은 내 입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죄의 속성과 관련이 있다. 내 단체 사진을 보면서, 내 얼굴은

부지런히 찾으면서 주변의 다른 친구들에게는 별 관심이 안 가는 현상과 비슷

하다. 남의 말을 금방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죄인들의 습관은 성경

읽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본문의 생각을 존중하며 그것을 조심스레 따라가기보다는, 각 구절들을 끊어 

읽고 그것을 내 머리 속의 조리법을 따라 요리한다. 그런 우리들에게 본문 

자체의 조리법에 해당하는 접속사들은 나의 요리를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접속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내 마음에 내 나름의 연결 방식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들어

나는 것은 말씀의 권위는 써먹고 싶지만 말씀의 논리가 내 논리를 흔드는 것은 

용납치 않는 우리의 이기적 습성이다. 지만 말씀은, 제대로 이해되었을 땐 

언제나 나 자신을 난도질하여 우리의 속내를 드러내는,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해부용 메스에 비유되지 않는가(히 4:13)?


아무리 많이 읽어도 성경의 생각을 이해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복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행 8:26-40). 중요한 것은 무작정 읽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깨달음은 순종으로 나아간다. 깨닫지 못한 말씀을 순종

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어떨까?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왜 성경 "100독"이라는 숫자에 난리를 치는 것일까? 잘 모르

는 책이라도 백번을 읽으면 뜻이 통한다는 선조의 지혜를 믿고 백번을 읽어

말씀을 읽어 말씀의 의미를 발견해 보겠다는 시도일까? 의미를 모르는 구절이

태반이라면, 모르는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대부분을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런 모습이 아닐까? 알거나 모르거나 무작정 읽겠다는 가상한

열정은 순종을 향한 노력의 표현일까, 말씀의 도전이 반갑지 않은 우리들의

종교적 몸짓일까? 심판의 기준이 "들음"이 아니라 "행함"이라면, 그리고 그

행함이 정확한 말씀의 전달을 전제하는 것이라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또한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성경은 무릎 꿇고

들어야 할 말씀일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도 편리하게 써먹을 수 없는 마법의

주문일까? 우리가 성경 읽느라 드리는 시간 중에서, 우리가 말씀 자체의 논리

앞에 마주하여 그 위력을 느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는 성경책 자체를 

애지중지하는가, 아니면 그 속에 담긴 생각에 감동을 받는 것인가?




- 권연경 교수님의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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