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1

[자의식 대수술!] (1)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말씀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3. 18:32





구약시대에서 가장 큰 구분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경우 이방인과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았습니다(요 4:9). 


바울은 "이방 죄인"(갈 2:15)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럴 정도로 차이가 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로 그 차이를 없애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로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이쓴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에베소서 2:11-19)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동등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옳은 것이지만, 너무 '유대인', '유대인' 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히브리적 관점으로 성경보기'는 절대로 바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골이 깊었던 유대인과 이방인만 하나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을 없애버렸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나 자유인이나 남자여자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



여기에 언급된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는 당시 사회에


존재했던 가장 심각했던 차별들입니다.


그 차이는 엄청났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고, 종들은 짐승이나 재산 취급을 당했고,


여자들은 사람 수를 셀 때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처럼 심각한 민족적인 차별,


신분상의 차별, 성별상의 차별을 모두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러고 그런 예수님이 교회 안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목사와 교사 등


오중사역자를 세우신 것입니다(엡 4:11). 


그런데도 이것이 교회를 성직자와 평신도 두 계층으로 


만들어 차별하게 하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바울이 기록한 대로 주님이 오중사역자들을 세운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엡 4:12)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봉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는 종으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지 마음에 각인시키기 위해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 13장).



예수님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의미에서의


지도자상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계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지도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문화와 로마문화는 모두 권위주의적 지도자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정치, 종교, 사회지도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아버지라는 존칭으로


불리기를 좋아했고,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을 당연시했으며, 


지도자로 불리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태복음 23:8-10)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로서는 매우 반문화적인 것입니다.


유대문화와 로마문화 모두 백성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지도자이시고, 성령님은 스승이시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믿는 자들 사이에 어떤 지배, 피지배의 관계도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훗날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믿는 자들은 지체들로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목사는 절대로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담임목사도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몸의 한 부분 즉 지체일 뿐입니다.


지체 중 머리 외에 어떤 지체가 더 높습니까?


높고 낮은 것이 없습니다.


서로 평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높고 낮은 것이 없는 동등한 한 형제입니다.


따라서 저는 본문의 핵심구절이 8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이것은 모든 목회자들이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진리입니다.


이 정신을 가지고 설교하고 사역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만이 멀리 달아날 것이며, 성도들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즉 성도들을 우리가 다스리고 군림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 진리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은 노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요한계시록 1:9)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고백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말을 했을 때 나이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목회자들이 처음에는 겸손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은 성직자라는 의식을 가집니다.


'나는 목회자다, 하나님의 종이다, 나는 사도다.' 이런 인식들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나이가 많아서도 자신을 다른 성도들과 동일한 형제로 인식했습니다.


당시 요한 외에는 열두 사도 중에 생존해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한은 세계 기독교의 정신적인 지주요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열두 사도 중에 유일하게 남은 교회 지도자이고 사도다.'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고 '나는 다른 성도들과 똑같은 형제다.' 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모든 목회자들은 반드시 이런 요한을 본받아야 합니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케네스 해긴 목사님 책에 보면 미국 문화 때문인지 몰라도


해긴 목사님에게 '해긴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옵니다.


이런 표현이 우리에게는 부자연스럽고 익숙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신재호 장로님의 아들 민용이에게 "형제님!" 하고 부르는 것은


괜찮은데, 민용 형제님이 저에게 "형제님!" 이러면 우리 문화에서는 큰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긴 목사님이 참 대단한 목사님이신데, 다른 성도들이 "해긴 형제님!" 하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꼭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미국 문화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도 베드로가 바울을 형제라 하고(벧후 3:15),


야고보가 사도와 장로들을 형제라 하고(행 15:13), 


바울이 아볼로와 디도와 디모데에게 형제라 하고(고전 16:12, 고후 2:13, 살전 3:2),


요한이 스스로를 형제라(계 1:9) 한 일은 있어도 성도님들이 


사도나 목회자들에게 형제라고 부른 사례는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 교회에서는 허물없이 목회자에게도 "형제님" 이라고 호칭합니다.


이것은 조금은 지나친 것으로써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민 교회의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무턱대고 서로 형제님, 형제님 하면 질서가 무너지고 


라오디게아 교회(민권교회)처럼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목회자들이 "형제님!" 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는 형제다!'라는 겸손한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아진 우리 목회자들의 마음과 생각이 진리를 통해 낮아져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 대한 무지로 높아져 있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것이 우리의 자리입니다.


겸손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본래 우리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편, '우리는 형제'라는 진리와 일맥상통하는 중요한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에베소서 5장 21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저는 오래도록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 구절에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성도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위치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장 18절의 연속입니다.


즉 에베소서 5장 18절 이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5장 18~21절은 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동사와 여러 분사구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뒤에 나오는 리적인 지침들은 성령충만의 결과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그 후에 나오는 부부관계, 부자관계, 주종관계에 다 적용되는


대주제입니다.


즉 본 문맥에서 주제 구절입니다.


이 주제 구절하에 바울은 세 쌍의 실천 덕목을 제시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상호윤리(5:22-23), 자녀와 부모의 상호윤리(6:1-4),


종과 주인의 상호윤리(6:5-9)가 그것인데, 이 교훈들은 5장 21절에 나오는


핵심구절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쌍의 교훈들을 5장 21절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의 빛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뒷부분들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뒷부분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에베소서 5:21-6:9)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읽지 말고 대전제인 


5장 21절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구절의 렌즈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구절들을 유교적으로 오해하지 않고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함께 그 작업을 해보겠습니다.






(1)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말씀



말씀 (에베소서 5: 21-33 참고)......


이 구절에 대해 교회는 오래도록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 한, 아내는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래도록 유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잘 들어맞습니다.


그래서 달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바울이 말한 것이 정말로 이런 뜻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피차 복종하라는 


대전제 아래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여성에 관한 질문들]이라는 책에서


에베소서 5장 21-25절을 인용한 후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이 '피차 복종하라'(21절) 라고 말한 것은 전체 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피차 군림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양보하고 기분 좋게 잘 지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구절은 


남편은 아내에게 군림하고, 아내는 결코 토를 달면 안 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그들이 서로 기분 좋게 서로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말씀한 같은 구절(고전 11:3)에서는 또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라고도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본질상 그리고 영원히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종이라는 주제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성경 구절로 입증되지 않으며, 


구절을 문맥에서 떼어 본뜻과 달리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노예나 종의


위치를 취해야 한다고 느끼도록 합니다. 그것은 자유 대신 속박을 줍니다."



또, 신디 제이콥스는 자신이 여성이라서 그런지 [여자여, 내가 너를 불러 세웠노라!]라는


책에서 에베소서 5장 21-31절을 인용한 뒤 이 구절에 대해 좀 더 과격하게 이렇게 


썼습니다.



"복종에 대한 이 성경 말씀은 피차 복종하는 개념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복종의 뜻은 '종속하다, 순종하다, 복종 아래 있다, 자신을 드리다.'이다.


교회가 피차 복종할 것에 대하여 결혼한 부부에게 거의 강조하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다!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여성에게 가르치는 설교는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며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처럼(요 13:4-9)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라는 설교는 하지 않는다.


이런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은 때는 언제인가? '당신은 주를 경외함으로 아내에게


복종하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을 남편들에게 하는 설교를 들었는가? 언제인가?


사실상, 이것은 거의 강조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이교의 가르침처럼 들릴 지경이다."



참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사실은 저도 5장 21절에 주의하지 않아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라는 말씀에 


나오는 복종에 대해 조금은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주제에 있어서는 부부학교를 하고 계시는 


김원호 장로님이 저보다 훨씬 앞서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부부학교에 등록하여 열심히 배우십시오.


그래서 부부관계가 회복됨으로 성경적인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경적이고, 양심적이고,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분입니다.


만약 남편의 의사나 결정이 이런 것이라면 마땅히 순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부간에 깊이 대화를 해본 결과 아내의 의견이 그쪽에 더 가깝다면,


그때는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피차 복종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머리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의문을 제가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매주 주제하는 목회자회의를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회의할 때 누구의 의견이든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양심적으로 해야 할 일이고, 


지혜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채택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협동목사님들이 자발적으로 


담임목사인 저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결정합니다.


저는 가정에서도 그런 경우에만 남편의 가장의 권위를 인정해서


남편이 결정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자의식 대수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