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1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2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8. 01:29





2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대부분 이 질문에 "오직 믿음!" 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대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뿐 아니라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2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히 6:1)



토마스 왓슨은 영국의 청교도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웨스터민스터 회의에서 소요리문답을 작성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회개]라는 책 첫머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생에서 성도에게 절대 필요한 두 가지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다. 이 둘은 성도가 하늘나라로 날아가는 데 필요한


두 날개이다."



한 날개를 가지고 새가 공중을 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회개나 믿음 둘 중의 하나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한편, 어거스틴은 "회개는 많은 사람을 정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거짓 회개가 많기 때문입니다.



조셉 얼라인은 "마귀는 많은 사람을 가짜로 회개시켜 놓고 이것저것으로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찰스 피니는 "언제든지 죄인에게 회개하라고 할 때에는 


회개의 의미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에 관하여는 거짓된 교리와


원리 등 너무도 많은 신비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회개의 의미뿐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회개가 아닌 것도 알려 주어야 한다.


그 의미가 아주 분명하여 쉽게 이해되던 단어들이 이제는 너무나 


왜곡되어 부연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죄인들에게 그릇된 개념을 전달해 주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바로 회개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바로 알고 참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떤 것이 진정한 회개일까요?



토마스 왓슨은 [회개]라는 책에서 참다운 회개의 성격을 


다음 여섯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1. 죄의 발견  2.죄를 슬퍼함  3. 죄의 고백  


4. 죄를 부끄러워함 5. 죄를 미워함  6. 죄에서 돌이킴"



그는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회개의 효력을 


잃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거짓 회개는 회개의 요소를 일부만 갖춘 것이고 


진정한 회개는 회개의 요소를 전부 갖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된 회개의 여러가지 요소들에 대하여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1. 죄에 대한 깨달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여기서 "죄인"은 자기의 죄를 깨달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달은 사람만 회개가 가능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유명한 전도자 D. L. 무디(Moody)는 죄를 깨닫게 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1. 양심  2. 하나님의 말씀  3.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1) 인간은 양심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됩니다.


양심은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양심은 언제나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양심은 바른 것과 그른 것의 차이를 인식하며,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한 좋고 나쁨을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에 의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양심의 가책에 의해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인간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됩니다.


양심이 죄를 깨닫게 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양심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영향을 받음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조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침례교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C. H. Spurgeon)은 


그의 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엄과 나의 추악함'이라는 두 가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를 공포와 참회로 가득하게 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삶을 누가 살펴보아도 특별한 죄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내 자신을 살펴 볼 때는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범했음을 보았습니다. 나는 불성실하고 부정직하고


욕하는 다른 소년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는 순간 나는 율법,


즉 십계명을 가지고 온 모세를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그것들을


읽는 동안 그 계명들은 모두 함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정죄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를 깨닫게"(롬 3:20) 합니다.


율법은 "죄를 죄로 여기게 하며"(5:13),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며,


죄로 심히 죄되게 합니다."(7:13)



(3) 인간은 성령님에 의해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죄를 책망하여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믿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전자에 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8-9)



사람들은 누가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책망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도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책망을 하시는데


특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집중적으로 책망하십니다.



고든 박사(A. J. Gordon)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바로 이 죄를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도둑질을 했다거나 거짓말을 했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성령께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고 말하지 않았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박영문 장로님이 쓴 [두고 보리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처가 8식구를 한꺼번에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결행하기 직전,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와서 새사람이 된 것을

 

간증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천국과 지옥을 보고 심판대 앞에 도달했을 때


거기서 우리나라 같은 자유 국가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 두 가지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그 두 가지는 '첫째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죄' 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죄요,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이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죄를 피상적으로 깨닫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죄를 깨닫는 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 것이 죄임을 


인정하는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찰스 하지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무가치함을 겸손히 자각하는 것, 그래서 진정한 회한과


스스로를 낮추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회개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죄인들임을 기꺼이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의 죄책을 가볍게 생각하며, 자기들이 대체로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인간처럼 연약한 존재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너무 지나친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가혹하게 형벌 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회개는 이렇듯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고를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다.


도저희 용서받을 수 없는 죄과가 자기에게 있음을 의식하고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리는 것이다. 자신을 정죄하며, 또한 하나님을


까다로운 주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요구와


판단이 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깨달음은 자기의 죄의 심히 죄 됨을 봅니다.


이렇게 죄를 피상적으로 깨닫지 않고 깊이 깨닫는 것의 


그 중요성을 D. L. 무디는 다음과 같이 잘 지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지 못할 때,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매우 명확한 표시가 된다. 자기의 죄가 그다지


중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만간 옛 죄에 다시 빠져 버린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죄의 끔찍함을 깨닫지 못하고서 신자가 되기 쉽다.


그가 처음으로 받게 될 반대, 핍박, 또는 조롱이 그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갈 것이다."



저의 목회 경험에 의하면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깨달아야합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제가 성경적인 회개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난 후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목사님, 회개를 하고 싶은데 회개가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회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바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이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고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둘째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입니다.


셋째는 '회개할 것이 없는 구원'입니다.



언제나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 이런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회개에의 경종]이란 책을 통해 조지 휫필드와 찰스 스펄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조셉 얼라인(Joseph Alleine)은 회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대가 필수적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빵이 필수적인가?


호흡이 필수적인가? 그렇다면 회개는 그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필수적이다...


재산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그대는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그것을 


다 팔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거래는 그대에게 크게 유익할 것이다.


생명도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버릴 수도 


있으며 그것은 그대에게 한없는 유익을 줄 것이다. 명예도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치욕을 당할 지도 모르나


그래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회개는 필수적이다. 이는 그대의 


구원이 회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회개에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가장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없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회개의 뿌리라면, 회개는 그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촉진시키고 회개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지 않고 세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부끄러워하지도(스 9:6, 겔 43:10-11),


슬퍼하지도(시 6:6, 38:18, 마 5:4, 눅 7:38, 약 4:8), 


죄로 인해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시 4:4, 잠 3:7, 14:6).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세상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물론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설교를 들을 때만


잠시 관심을 표명할 뿐입니다. 집에 가면 아니 설교가 끝나자마자


그들의 진지함이나 영혼에 대한 관심은 곧 사라집니다.


설교 종료와 함께 고민도 끝입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가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회개를 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말씀의 찔림에 의해 생겨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여러분의 가정으로 가져가십시오. 


여러분의 직장과 여러분의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십시오.


그러면 회개가 가능해집니다.


 

 


3. 죄에 대한 고백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자백과 혼동하는데, 자백은 회개가 아닙니다.


단지 회개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잠 28:13)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렙 3:1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



이와 같이 성경은 죄를 자백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모든 자백이 죄 용서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발람, 사울, 유다와 같은 악한 사람들도 자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자백을 해야 하는데,

 

참된 자백을 하려면 다음 세 가지에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자백은 개별적으로 해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인 것은 인정하지만 도매금으로 죄를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말하나 자신의 죄를 


낱낱이 자백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참된 회개자는 환자가 의사 앞에 가서 자기의 아픈 곳을 말하듯이,


영혼의 의사이신 그리스도께 자신의 죄를 소상하게 아룁니다.


열 군데가 아프면 열 군데를 다 치료해야 합니다.


같은 종류의 상처라도 상처 난 회수만큼 치료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찰스 피니는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의 과거사를 돌아보라. 당신이 몸소 지은 죄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추어 보라. 나는 당신이 당신의 과거의 생활을 힐끗 돌아본 다음,


죄로 가득한 것에 동의 하면서 나아가 총괄적인 자백을 하며 용서를


빌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당신은 죄를 하나씩


하나씩 다루어야만 한다. 당신의 죄를 조목조목 다룰 때에 연필과 종이를


갖고 생각나는 대로 쓰면 좋을 것이다. 장사꾼이 정부를 조사하는 것처럼


세심하게 조사하라. 그러고 죄가 또 생각날 때마다 추가로 적어라.


죄를 총괄적으로 자백하면 절대로 안 된다. 당신이 죄를 한번에 하나씩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록과 행위록이 있습니다.


행위록에는 우리가 언행심사로 지은 모든 죄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대로 베풀리라."(시 50:21)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므로 자백도 개별적으로 해야 합니다.



둘째로, 자백은 깨끗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에 여전히 죄를 품은 상태(시 66:18), 다시 말해서 욕심을 그 마음에


잉태한 채로 (약 1:5) 죄를 자백하는 것은 가증한 일입니다.


우리는 죄를 자백할 때, 마음속의 죄를 낙태시키고 해야 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비장한 각오로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죄를 자백하나 마음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마치 도둑이 잡힌 후 마지못해 훔친 물건을 자백하거나 여전히 훔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같이, 거짓 회개자는 죄를 자백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사랑합니다.


일례로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에 죄를 고백하고 죄를 이길 능력을


구하면서도, 그이 마음은 내면으로부터 "아직 아닙니다. 주여"라고


속삭였다고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려면 죄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에스라 10장 10-12절에 보면 자백에 대한 훌륭한 모델이 나옵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이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이와 같이 죄를 끊어 버릴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자백해야 참 자백입니다.



셋째로, 자백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께 자백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지은 죄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자백을 하나님께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 말씀에 주의해 보십시오. 어떻게 이런 화해가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

 

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

 

 

 

이 말씀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일 서로가 잘못을 하나님께만 자백하고

 

형제에게 가서 할 필요가 없다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리고 그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으면 가서 즉시 자백하고 거기서 나오라. 만일 당신에게

 

해를 받은 사람이 너무 멀리 살면 편지로 그 일을 자백하고 당장 우송하라.

 

이 모든 일이 철저히 해결하라. 지금 그렇게 하라. 뒤로 미루지 말라.

 

연기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법이다.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께

 

자백하고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자백하라."

 

 

그렇다고 마음으로 범죄한 것까지 사람에게 자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큰 피해나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은 소소한 일까지

 

다 자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지혜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우리는 자백을 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자백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드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요 16:8).

 

그러나 정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참소하는 자인

 

사탄의 역사입니다(계 12:10).

 

어떤 사람은 죄를 깨닫기는 깨달았는데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절망감과 정죄 당하고 있는 느낌을 가지고 있고,

 

벗어날 길은 없고 그런 느낌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가져다 준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자백한 후에 용서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의 토'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 그의 '자비' '공의' 중 어느 것을

 

토대로 하여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까요?

 

대분분의 사람들이 자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단순히 자비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을 것입니다(벧전 3:18).

 

이 십자가 사건 때문에 이제 용서는 자비의 문제가 아니라

 

공의의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함이로써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리를 용서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요청할 수 있고, 또한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고 죄 용서를 확신하는 것

 

결코 주제넘는 행동이 아닙니다.

 

 

 

 

 

 

4. 피해에 대한 보상

 

 

 

"배상이 없으면 용서도 없다." -어거스틴-

 

 

"너희가 만일 부당하게 얻은 재산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너희는 지옥에서 기침하며 토해낼 것이다." -타이머-

 

 

누구든지 어떤 형태로든 남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끼쳤으면

 

양심적으로 보상해야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 하고

 

갑절을 배상할 지니라."(출 22:1-4)

 

 

이와 같이 도적질한 짐승을 잡거나 팔았을 경우엔 소는 5배,

 

양은 4배로 배상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에 계획적인 악의가 드러났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배상할 능력이 없을 경우엔 종이 되어서라도 배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보존하고 있을 경우엔 두 배로 배상하면 되었습니다.

 

다윗이 나단의 비유를 듣고 노하여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6)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누구든지 여호아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 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는 또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올지니 곧 너희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수양을 속건 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 올 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으리라."(레 6:1-7)

 

 

여기서 주목할 것은 5절의 "돌려보낼 것이니"라는 부분인데

 

이는 속건제의 보상 혹은 벌금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먼저 사람들 사이에 보상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당연히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결코 배상의 의무에 대한 면죄부가 아닙니다.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민 5:7)

 

 

그러므로 죄를 자백했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보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9장 8-9절에 보면, 삭개오가 예수님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것은 구약시대의 관행이요,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 대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피해 보상을 해야 합니다.

 

 

이제, 피해 보상을 하고자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몇 가지

 

의문에 대해 답해드리겠습니다.

 

 

먼저, 보상을 하고 싶지만 피해자가 죽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경우에는 그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대신 보상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가족이나 친지도 없는 경우, 그리고 피해자가 살아 있지만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경우에는 대신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패역하여

 

그 몸에 죄를 얻거든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줄 것이요.

 

만일 죄 값을 받을만한 친족이 없거든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수양

 

외에 돌릴 것이니라."(민 5:5-8)

 

 

마지막으로, 보상을 하고 싶으나 형편이 안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경우에는 일단 힘닿는 데까지 일부라도 보상하고

 

앞으로 형편이 되면 전부 보상할 것을 신실하게 약속해야 합니다.

 

또한 보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경우 피해자가 너그럽게 그것을

 

탕감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5. 모든 죄에서 돌이킴

 

 

 

어느 주일 잔디 위에서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이 운동을 하고 있을 때,

 

문득 그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죄와 함께 지옥에 가겠는가?

 

아니면 죄들을 버리고 하늘나라로 가겠는가?'

 

 

이 질문에 그는 죽도록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죄를 버리기로 결단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를 버리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에스겔 18장 30-31절

 

말씀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르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회개에 관한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8-10)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줄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누구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반역 활동을 계속하는 한 어떤 반역자도 왕이 용서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죄를 버리기를

 

거절하는데도 이 세상의 심판자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리라고

 

상상해서는 안된다."말했습니다.

 

또한 조셉 얼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히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그들의 소망의 바탕으로 삼으려 하지만, 분명히 말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회개치 않고 계속 죄 가운데 있는 완고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죄악을 붙들고 있는 그대를 그리스도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세주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악한 사람들과 지옥에 있는 마귀가 그렇게

 

했거나 그럴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하나님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것이 된다.

 

그런데도 그대의 참람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찰스 하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돌아서는 것이다.두려움과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죄에서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알고

 

진정한 뉘우침과 겸손, 그리고 고백과 함께 그 죄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다음으로, 회개는 모든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습니다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어떤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모든 죄에서!" 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겔 18:30-31)

 

그러므로 "다 버렸는데 한 가지 정도야."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다른 것도 다 포기했는데 이 한가지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헛되게 할 수는 없지."

 

이렇게 말하고 과감하게 한 가지 남은 죄를 버리십시오.

 

 

한편,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한 이런 말씀을 듣고 나면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회개가 가능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회개는 죄를 떠나고 모든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전혀 안 짓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찰스피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따금 강력한 유혹을 받아 죄를 짓고 나서는 회개하고

 

당분간 그것을 버렸다가 다시 유혹에 굴복하여 그 죄를 범한다면 그가

 

죄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고의적이고 상습적이며

 

고집스럽게 이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며 항상 그 죄를 버리려고 하며 그것에

 

저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유혹이 그를 덮쳐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볼때에 그것은 우발적인 범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해 보면 회개는 성화(聖化)가 아닙니다.

 

저는 조셉 얼라인의 다음과 같은 말이 회개한 자가 어떤 자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적합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는 죄와 영원히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죄들을

 

가리키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가 짓는 죄들을 가리키며 특히 자기 가슴속에

 

있는 죄들을 원수시 하게 된다... 온전히 회심한 자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죄를

 

대적하게 된다. 그는 죄와 몸부림치고 싸운다. 자주 실패하긴 하지만 호흡이

 

붙어 있는 한 신조를 굽히지 않고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화해하지

 

않고 사정없이 공격한다. 그는 다른 적들은 용서할 수 있으며 화해할 수도

 

있으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며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다."

 

 

여러분 비록 온전히 거룩하지 않아도 이런 자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이며 천국에 갈 사람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목사님 중에 박용규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장로교 합동 측의 목사로 성남제일교회를 개척하여 4-5,000명 이상

 

모이는 대교회로 성장시킨 분입니다.

 

또 송림 중,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연소 교장과 이사장이

 

되었고, 책도 영화화 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외에 57권이나 썼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나님의 징계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국과 지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옥의 크기가 너무 컸습니다.

 

지옥의 크기에 깜짝 놀란 목사님은 천사에게

 

"천사님, 지옥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이 중요합니다.

 

 

"지옥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100% 지옥에 온다.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모두 지옥에 온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0-2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또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3장 8-9절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말자.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13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할 내일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극적으로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유명한 복음전도자 무디가 시카코의 교회에서 주일 저녁 예배 때

 

'회개하라' 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다가

 

"자 오늘 저역은 시간이 다 되어서 더 말씀할 수가 없으니

 

다음 주일 저녁에 다시 오십시오." 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시카고 저역에 대화재가 발생해서 그날 무디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그때서야 무디는 "내가 왜 그때 당장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고

 

다음 주일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던가!" 라고 후회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

 

네가 알수 없음이니라."(잠 27:1)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은

 

 

"우리가 또 하루를 더 살 것이라는 무슨 보증이라도 있는가?

 

우리는 빠르게 세상 밖으로 행진하고 있으며,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

 

우리의 생명은 곧 꺼져 버리는 작은 초 토막이며 인간의 생명은 풀보다

 

빨리 시드는 들의 꽃에 비유된다(시 103:5). 인간의 생명은 다만

 

날아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덮고 지금 곧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