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1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6 거듭남 (2)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8. 01:13

 

 

 

 

 

6 거듭남(2)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7-10)

 

 

 

 

 

조지 휫필드는 요한복음 3장 3절을 본문으로 300번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와서 “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으로 그렇게 자주 설교를 하느냐?”

 

 

물었습니다.

 

 

그때 조지 휫필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거듭나야만 하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확실히 거듭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자신이 거듭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니고데모는 누가 보아도 모범적이고 훌륭한 신앙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은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난 자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종교적으로 대단히 진지하고 신실하며 틀림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여도 실제로는 거듭나지 않은 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넘겨짚지 말고 자기의 거듭남의 여부를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거듭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거듭남의 여부를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

 

 

요한일서를 읽어 보라고 권합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거듭남에 있어 시금석이 될 수 있는 직접적인

 

 

성구 다섯 군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

 

 

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7-10)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

 

 

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그냥 넘겨짚지 말고 이 말씀들을 가지고 정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십시오.

 

 

그러면 진정으로 거듭난 자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도덕적인 변화 즉 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표증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성경 구절들로부터

 

 

이끌어낸 논리적인 결론들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에이든 토저는 그 해악을 [거듭난 자의 생활]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질문실에서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와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당신은 주님이 당신을 받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기를 원합니까?’

 

 

‘예.’

 

 

‘그래요. 그러면 이것을 읽으십시오.’

 

 

‘내게 오는 자를 나는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예.’

 

 

‘자, 만일 예수님이 당신을 내어쫓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내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요. 자, 그가 지금 당신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신은 그의 자녀 입니다.

 

이제 당신은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고백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어리둥절하여 구하던 그 사람은 억지로 웃음을 띠게

 

 

강요되고 그가 그리스도에게 개종케 되었노라고 증거하게 된다.

 

 

그는 정직하고 참된 것을 구했으나 잘못 인도된 것이다. 그는 영적

 

 

논리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그와 같은 확신은 흔들리는 삼단논법에

 

 

의존하고 있다. 거기에는 증거도 없고, 즉시로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내적 변화의 인식도 없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삼단논법에 의해

 

 

구원의 확신을 얻곤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죄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그것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또 존 스토트는 “새로운 탄생은 새로운 행동을 낳는다. 죄와 하나님의

 

 

자녀는 양립할 수 없다. 그들이 가끔 만날지는 모르지만,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살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니 힌 목사님은 “거듭남의 체험이란 교회에 와서 눈물 몇 방울

 

 

흘리며 ‘주님,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밖에 나가서 다시 자기 방식대로

 

 

죄악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남의 역사는 우리

 

 

삶에 기적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내 자아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를 통해 자기 자신의 거듭남 여부를

 

 

냉정하게 분별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상징하는 재미있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데 나로 건너게 하라

 

 

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때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삿 12:6)

 

 

 

 

히브리어로 십볼렛은 ‘곡식의 이삭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것이 이삭이듯이

 

 

요단 나루턱에서 재판장이 서서 참 가나안으로 들어갈 사람들과

 

 

그 나루턱에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한 단어가 바로 십볼렛입니다.

 

 

 

입다의 친구들이 십볼렛이라고 보다 온전하게 발음한 것은

 

 

충실한 열매 이삭을 나타내며, 입다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열매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입다의 원수인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 말을 더 세게 발음한 것은

 

 

그 이삭 속이 텅 비어 쭉정이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외식자들이 그럴듯한 종교의 모습을 보이나

 

 

실질과 열매가 없음을 상징화시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과 거짓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열매에 의해 거듭난 여부를 분별해야 합니다.

 

 

 

존 윔버의 [영적 성숙을 위한 7가지 제언]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몇 년 전에 한 초심자가 회심한 이후 자신의 삶 속에 생긴 몇 가지

 

 

변화에 대한 얘기를 내게 한 적이 있다. 그는 술을 마시기보다는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매일 일과 후에 같은 술집을 찾았다. 회심 후

 

 

첫 번째 월요일에 그는 평소처럼 그 곳을 찾게 되었고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는 맥주 한 병을 시켜 놓고

 

 

어떻게 그가 자신의 삶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는 차가운 침묵이 흘렀고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나와 버렸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는 담배

 

 

냄새가 역겹게 느껴졌고, 맥주 맛이 예전처럼 좋지 않았으며, 상스러운

 

 

말들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주의 중간쯤에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소속되지 못함을 깨달았고 어떻게 자신의 욕망이 이렇게도

 

 

빠르고 급진적으로 억제되었는지를 알기 원했다. ‘그건 쉽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다. 다시 태어난 것이지요.

 

 

당신은 새로운 마음과 희망을 가진 새로운 사람입니다. 이제 당신은

 

 

다시는 과거의 습관이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사례입니까?

 

 

그렇다고 내가 항상 거듭남은 이렇게 극적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거듭남을 조용하고 거의 눈치 채지 못하게 경험합니다.

 

 

그래서 거듭났을지라도 자기가 언제 거듭났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특히 모태 신앙인에게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한 가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즉 언제인지는 모르나 죄에서 해방되었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주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의 거듭남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다면

 

 

그는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노파심에 한 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거듭남은 ‘마음과 의지의 변화’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성화와 다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증거인 생활의 열매를 완벽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거듭난 자가 도무지 죄를 짓지 않거나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같은 서신인 요한일서 1장 9절-2장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자, 우리는 두 가지 말을 듣습니다.

 

 

“거듭난 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씀과

 

 

“거듭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자백해야 한다.”

 

 

말씀입니다.

 

 

그러면 정확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기준은 이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거듭난 자도 때로 범죄합니다.

 

 

그러나 죄가 그를 주관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곧 뉘우치고 자백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백만 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거듭난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확한 자기 점검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에 의해 발생하는 생활의 변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아니라 거듭나는 즉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일단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는 즉각적으로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썬다 싱 역시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즉시

 

 

그의 생활과 활동은 그 전과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흔히들 착각하는 것처럼 거듭남 이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즉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진리를 굳게 잡아야 하고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를 놓쳐 버리면 거듭나지 않은 자도

 

 

“나는 거듭났는데 아직 믿음이 어릴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주게 되며, 결과적으로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말한

 

 

거듭남의 시금석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미혹이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타협함이 없이 이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2. 중생과 칭의, 어느 것이 먼저인가?

 

 

 

 

 

제가 가끔 하는 얘기입니다만, 종교개혁 이후 믿음은 강조되고

 

 

회개는 소외되었고, 칭의는 강조된 반면 중생은 소외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혼의 안전을 고려할 때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이 왜 위험한 것인지 여러분께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인류가 타락했을 때 인간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죄책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죄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또한 그는 타락의 산물인 내적 부패 때문에 죄의 포로가 되었음으로

 

 

자유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타락은 죄책과 부패, 두 가지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구원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즉 구원은 중생과 칭의,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죄책 때문에 인간에게는 칭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적 부패 때문에 인간에게는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새로운 탄생]이라는 책에서

 

 

“만일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누군가가 죄의 값을 치르고 새로운

 

 

본성을 줌으로써 구원받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또, 스테판 차녹은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중생을 구하십시오. 중생은 칭의 만큼이나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 사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중생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본성이 거듭나기를 반드시 소망해야 합니다.

 

 

중생과 칭의는 똑같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내주하는 의를 가지려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되는 의를 절대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타락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변화된 것과 동시에 우리의 본성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래 신분을 되찾는 일은 우리의 원래 본성을 다시 회복하는 일과

 

 

동일하게 추구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존 라일은 [거듭난 생활]이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수행하시는,

 

 

명백한 두 가지 사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그 자신의 피로 죄인의 죄를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죄인에게

 

 

값없는 용서를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을 불어넣으시고 우리를 완전히 새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이 두 가지 사항은 둘 다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되어지지 않습니다. 결코 따로

 

 

발견되지 않습니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모든 사람은 중생한 자입니다.

 

 

그리고 중생한 모든 사람은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자입니다...

 

 

죄 사함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눈먼 소경이나 다름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은 구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든 용서하지 아니하시든,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죄의 용서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썬다 싱은 이런 사상을 주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어 냈습니다.

 

 

어느 날 숲 속에 들어가 깊이 기도하던 썬다 싱은

 

 

그 자리에 현현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주님과 나눈 대화의 내용이 [그 발 앞에 엎디어]입니다.

 

 

그 책에 보면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에서라야 온다. 사람은 죄의 용서를 받더라도

 

 

그 죄의 병으로 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정신착란증에 걸린 폐병 환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침대

 

 

곁에는 몇 개의 과일과 칼이 놓여져 있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는데, 그만 그 환자는 부지불식간에 칼로 그 친구의 숨통을

 

 

잘라 버렸다. 이로 인해 그는 어느 날 오후 5시에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왕에게 가서 그는 이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이므로 그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그가 이미 폐병으로 죽은 후였다. 그의 범죄는 질병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죄 용서함은 받았으나, 그 죄의 뿌리가 되는 질병은

 

 

치유 받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한 이유이다. 왕의 사면은 이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되었다.

 

 

그의 구원은 병에서 놓임을 받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성육신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를 죄의 병에서 구하며 또 그 형벌과 죽음

 

 

에서 건지며 죄의 결과와 원인을 제거한다. 이리하여 믿는 자는 멸망을

 

 

면하고 죽음에서 벗어나 무한한 생명의 후사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마치 동전과 같아서 양 면이 있는데,

 

 

한 면은 칭의이고 다른 면은 중생입니다.

 

 

어느 한 면만 보면 그것이 구원의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은 둘 중 하나만 가지고는 참된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둘 다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가 봅시다.

 

 

구원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와 중생 중

 

 

어느 것이 앞면이고 어느 것이 뒷면일까요?

 

 

 

오래 전 저는 기독교 서점에 갔다가 스테판 차녹이 쓴

 

 

[거듭남의 총체 1권]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라는 책을 샀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거듭남에 관하여 가장 긴 책을 쓴 사람이

 

 

바로 스테판 차녹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거듭남에 대해서 그렇게 길게 쓰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래에 저는 거듭남을 포함해서 구원론에 관한 책은

 

 

더 이상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불과 7년 전만 하더라도 구원론과 관계된 책은 무조건 사서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구원론에 관해서라면 이미 충분한 연구를 했고,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책을 샀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을 살펴보다가 ‘중생하지 않으면 칭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라는 소제목이제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평소 제가 설교하는 내용 중에는 다른 설교자들이 말하지 않는

 

 

매우 특별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이상한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성경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고 공정한 태도로 듣는 사람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모든 사람의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도 자주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말을 인용해서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쉽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라기보다 제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저는 스테판 차녹의 책을 샀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서 읽어 보니 예상한 대로, 내용만 길었지

 

 

불필요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청교도들의 설교의 약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책이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그 책에서 저자가 ‘중생하지 않으면 칭의는 있을 수 없

 

 

탁월한 지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책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진리를 알게 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설교하기가 쉽지 않은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이 점에 있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듣는 이들의 편견도 심합니다.

 

 

그런데 반갑게도 스테판 차녹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칭의를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의는 원래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의로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만큼이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예를 고려해 볼 때, 어떤 사람의 의지 속에 죄를 범하겠다는

 

 

상습적인 고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윤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도 죄를 범한 사람이 죄에서 돌이키고 이전의 성향으로 회귀해야

 

 

용서받기에 매우 적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중생하기 이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의로웠다고 하는 셈이 된다.”

 

 

 

 

아마도 이 설교를 들으면 펄쩍 뛸 설교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 로마서 4장 1-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런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 말씀을 설교할 때에

 

 

 

“현재 우리가 불의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칭의이며, 이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을 통해 부활된

 

진리의 가장 진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해야만 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통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일치하는 견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장과 일치하는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선입견이라는 안경을 쓰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이 말씀이 실제로 그런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죄’ ‘불법’ 믿기 전에

 

 

행한 불법이지, 거듭난 자들이 가져야 할 순종에 반대되는

 

 

불순종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즉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죄와 불법은 현재까지의 죄, 보다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죄이지 내가 현재 종 노릇을 하고 있거나

 

 

고집하고 있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현재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무조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 증거로, 바울이 여기에서 자기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다윗의 시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1-5)

 

 

 

 

여러분, 이것이 현재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저 하나님의

 

 

자비나 은혜에 매어 달리고 있는 자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과거에 간음죄와 살인죄라는 끔직한 죄를 지었으나

 

 

지금은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다윗의 심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자기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바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곳에서 현재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을 십자가 보혈

 

공로에 매달린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며,

 

 

그것이 칭의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오 모순입니다.

 

 

 

그런 주장은 성경의 전체적인 주장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간단한 예로, 칭의는 무엇으로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지요.

 

 

그러면 믿음 전에 무엇이 옵니까?

 

 

회개가 옵니다.

 

 

그리고 회개란 무엇입니까?

 

 

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주장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에 동의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이며,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약 2:14,19).

 

 

믿음은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전적으로 기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주장은 성경의 진리를 정직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을 성경처럼 절대시하고 그들의 주장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음 성경 구절들을 숙고해 보시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중생이 없는 칭의, 즉 내적 변화가 없는 칭의는

 

 

완전히 비성경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11)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네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히 8:10, 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무엇보다도 디도서 3장 5-7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희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자, 이 말씀들을 충분히 숙고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생과 칭의 중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분명히 중생이 먼저지요.

 

 

 

물론 중생과 칭의는 각기 다른 시간에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동시에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받았는데 중생하지 않았다든지,

 

 

반대로 중생은 하였는데 칭의는 받지 못한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칭의보다 중생이 먼저입니다.

 

 

칭의가 먼저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점이 왜 중요할까요?

 

 

왜 이것을 이렇게 시간을 들여가며 설명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좀 심하게 표현하면 뱀의 혀를 가지고 있습니다.

 

 

뱀은 그 혀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보면 마치 두 갈래의 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로마서 4장을 설교할 때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야고보서 2장을 설교할 때는

 

 

“믿음으로만 안 된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성도들이 갈 길을 잃고 갈팡질팡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이 복음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부족하여

 

 

이렇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간혹 행함 있는 산 믿음에 관한 설교를 할지라도

 

 

성도들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단지 행함을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이렇게 일구이언(一口二言)을 일삼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로마서 4장 1-8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중생 없는 칭의는 없다.’는 성경의 명확한 진리를

 

 

교리적인 편견으로 인해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3.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없는가?

 

 

 

 

 

천국은 오직 거듭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 3:5)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아주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왜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시지만,

 

 

거듭나지 않은 자는 천사들을 시켜 못 들어오도록 금하실 것이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육적 생각 즉 땅의 방식으로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생각이 아닙니다.

 

 

 

썬다 싱이 쓴 책 중 최고의 걸작은 [그 발 앞에 엎디어]입니다.

 

 

그 책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금수나 조류가 인간과 오랫동안 생활한 뒤에 그 종족 가운데로

 

 

돌아가면 그들은 환영하기보다 도리어 공격하고 죽인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오랫동안 인간과 사귀어 살면서 인간과 친해진 결과 생활

 

 

습관과 행동이 전혀 다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금수도 인간의 감화 밑에

 

 

있던 자는 자기들의 종족사회에 들이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이 악인과 친히 교제하며 살던 자를 환영하겠느냐?

 

 

이것은 성도나 천사들이 죄인들을 사랑하지 아니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 위의 거룩한 환경은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조화가 되지 않아

 

 

살기 어렵다. 확실히 이 세상에서도 죄인은 선인의 무리에 들기

 

 

싫어하거든 어찌 영원히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 그들에게는

 

 

지옥과 같이 마음에 괴로운 곳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나님이나 천사가 죄인을 지옥으로 추방하는 줄로 생가하지 말라.

 

 

사랑이신 하나님은 결코 아무 사람도 지옥으로 쫓아 보내지 않는다.

 

 

또 영원히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 죄인의 어리석은 생애가 자연스럽게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 사람은 생애를 마치기 전에 천국이나

 

 

지옥 어느 편에 접근한다. 그의 신약에 따라 그의 심중에 천국이나

 

 

지옥이 건설된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원한 고통을 면하고자 하는 자는

 

 

진심으로 그 죄를 회개하여 그 마음을 나에게 바치라. 그리하면

 

 

그와 함께하는 나의 임재와 성령의 감화에 의하여 그는 영원히

 

 

천국 백성이 될 것이다.”

 

 

 

썬다 싱이 지은 책 중에 [그 발 앞에 엎디어]에 버금가는 책은

 

 

[영계의 묵시]라는 그의 입신 간증서입니다.

 

 

그 책에 보면 ‘악인이 허락되어 천국에 들어간 때’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주요한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앞에 한 악인이 죽어 영의 세계에 들어왔다. 천사와 성도들이 그를

 

 

도와주려 하자 그는 도리어 저주하며 욕을 하였다.

 

 

‘하나님은 도대체 나쁘다. 그는 너희와 같은 아첨쟁이들을 위하여

 

 

천국을 준비하여 놓고 다른 사람들을 지옥에 쓸어 놓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그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한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시다. 그분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영원히

 

 

행복한 교제 가운데 살게 하려고 창조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완고함과 자유의지의 오용으로 말미암아 그 얼굴을 하나님께로서

 

 

돌리고 지옥을 제 집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지옥에 쓸어

 

 

넣지 않으신다. 사람이 스스로 그 죄에 얽매어 자신을 위하여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지옥을 만들지 않았다.’

 

 

비록 그때 높은 천사 중 하나가 극히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올 것을 허락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부터 들려왔다. 그 사람은 의기양양하여 천사들을

 

 

따라갔다. 그러나 그가 천국의 입구에 도달하여 거룩하고 빛으로

 

 

충만한 장소와 거기 살고 있는 영광스러운 축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볼 때 그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천사는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가? 좀더 나아가 주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라.’고 말하였다. 그가 입구에서 엿보니 그의 태양이신

 

 

주의 광채가 그의 불결하고 죄로 더러워진 생애를 환히 비추어

 

 

드러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급히 도망하여

 

 

숨고 돌과 같이 거꾸로 지옥 속으로 몸을 던져 뛰어들었다.

 

 

그 때 아름답고 황홀할 만한 주의 음성이 들렸다.

 

 

‘보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아. 아무도 여기 오는 것을 금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이 사람을 막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여기서 나가라고

 

 

명령한 사람도 없다. 이 거룩한 곳에서 도망하게 만든 것은 그 사람의

 

 

불결한 생애이다. 그것은 사람이 만약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통해 신앙 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이 인도의 성자 썬다 싱입니다.

 

 

썬다 싱은 특히 입신을 많이 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기도를 한 지 20분 정도 지나면

 

 

입신 상태에 들어가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썬다 싱]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썬다 싱이 입신하여 천국에 있는 천사와 성도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가 한 줄로 늘어서서 심판을 받게 됩니까?”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육체를 떠난 영혼은 자기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알게

 

 

됩니다. 기억이 모두 살아남으로써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빛이 악인들에게 비취면 그들은 곧 자신들이 성도와 천사들과

 

 

함께 동거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들에게 적합하지 않음을 알고, 천국을 떠날 수 있도록 간청하며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담장과 대문이 있어서 통행증을 제시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이 곧 통행증이 되는 곳입니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되지만,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심판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 심판은 매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심판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그가 개입하시는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내적인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이 최종적인 결과를 선언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때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들이 모든 피조물들 앞에서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썬다 싱을 신비주의자로 여깁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요한이 신비 체험을 많이 했으나 신비주의자가 아니듯이

 

 

썬다 싱 역시 신비주의자가 아닙니다.

 

 

썬다 싱은 주님을 사랑하고 거룩했으며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나 요한처럼 많은 계시를 받게 된 것뿐입니다.

 

 

썬다 싱이 받은 계시는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그보다 전에 이미 많은 기독교의 거장들이 같은 주장들을 펼쳤습니다.

 

 

예를 들어, 존 라일 감독은 “아담의 자녀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그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그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용서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새로워진 마음이 없다면 하늘나라를 즐길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찰스 피니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이 혹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자신이 편안함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죄인들은 이 세상에서도 신령한 교제에서 평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면, 기도회에 참석한 죄인의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천국에 거한다는 것은 죄인 자신에게도

 

 

편안함을 주지 못한다. 이것은 죄인의 영혼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짜증나고 안타깝게 할 뿐이다. 만일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천국에 거해야 한다면 그 영혼은 대단히 괴로울 것이며 무척 화를

 

 

낼 것이다.”

 

 

 

스테판 차녹은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라는 책에서

 

 

‘영광(천국)의 상태에 필요한 중생’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그 중 중요한 부분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영광의 상태를 위한 적합성과 적절함을 구비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경건한 일을 골치 아프게 생각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도 어떤 일이 경건한 분위기를 조금만 풍겨도 그 일을 고역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면 그곳에서는 모든 일이 다 경건한

 

 

일인데, 옛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일 중에 무슨

 

 

일을 만족스럽게 여기겠습니까?... 순결한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숭고한 의무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면, 불순한 영혼은

 

 

얼마나 더 부적합하겠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설령 천국에

 

 

들어간다 해도 천상의 합주회 가운데서 아무런 기쁨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성도들의 찬양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스스로 포기할 것입니다... 천국의 보상은 우리 안에

 

 

합병되어 있고 다름 아닌 우리 영혼의 기질 안에 아로새겨진 어떤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천국의 보상을 기쁘게 생각할 줄

 

 

모릅니다.

 

 

진창에서 뒹구는 것을 제일 큰 행복으로 여기는 돼지는 장미가 만발한

 

 

화간을 보고도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천국의 참된 즐거움을 기뻐할 줄

 

 

모릅니다... 마귀의 본성에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남아 있는 한, 설령

 

 

그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는 만족을 누리기는 고사하고 괴로움만

 

 

느낄 것입니다. 사악한 사람의 경우, 그가 그 자신의 심각한 고통을

 

 

계속 지니고 있고 그 마음에 맹렬한 기세로 들끓는 정욕을 품고 있는 한,

 

천국의 한복판에서도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정욕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자신이 있는 장소를 있는 그대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로 천국이란 장소일 뿐 아니라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천국에서 행복의 참된 본질에 반대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장소가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본질적인 성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대로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 역시 사람 안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가장 선한 일을 하고도 관원들에게 잡혀서 매를 맞고 더럽고 냄새나는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상처는 쑤시고 냄새는 지독하고 죄수들의 불경한 말과 욕설이 난무하는

 

 

그 곳은 자체로는 마치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서 신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바울의 몸은 감옥에 있었지만 바울의 마음에는

 

 

천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몸은 아프고 환경은 비참해도

 

마음에 천국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이것은 역으로도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유하고 좋은 환경 속에서도 괴로워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천국도 지옥도 다 내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마음에 천국이 없고 지옥이 자리잡고

 

 

있는 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속의 ‘의’ 형성되지 않으면

 

 

‘평강’이고 ‘희락이고 다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거듭 선언하신 대로 천국의 평강과 희락은 모두 의에 기초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심’(엡 2:10)

 

 

받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 해도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도 행복할 수 없다.”

 

 

이 진리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진리는 죄인들 안에 있는 거부감을 제거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적인 회개와 성경적인 믿음,

 

 

그리고 성경적인 구원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가르치면

 

 

어떤 사람은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크게 충격을 받고 각성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의 일부는 정말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일부는 진리를 알고 고민하고 씨름할 뿐 여전히 거듭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반발심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이렇게 좁게 만들어 놓았을까?

 

 

왜 하나님은 그렇게 까다로운 회개와 믿음과 거듭남을 요구하는 것일까?

 

 

구원의 조건이나 기준을 좀 더 낮추어 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렇게 기준을 높게 만들어 놓아서 사람을 이 고생을 시키나!’

 

 

 

 

일단 이런 생각을 허용하면 연이어 다음과 같은 미혹이 찾아옵니다.

 

 

 

‘정말일까? 정말로 구원받기가 그렇게 힘든 걸까?

 

 

이거, 우리 목사님이 뭔가를 잘 모르고 지나치게 기준을 높게 정하고

 

 

우리를 몰아붙이는 거 아니야? 다른 목사님들은 그렇게 설교하지

 

 

않잖아. 맞아.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야.’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진리의 밝은 비췸을 받고도 오랫동안 올바로

 

 

반응하지 않은 까닭에 마귀가 그 틈을 타서 합법적으로 그를

 

 

까부르고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실제입니다.

 

 

실제로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미혹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가 자기에게 응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방금 우리가 함께 나눈 진리는 이와 같은 의심과

 

 

반항감을 뿌리 뽑는데 아주 효과가 큽니다.

 

 

이에 관해 찰스 피니는 [진정한 부흥]이라는 그의 탁월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보다도 자비와 사랑이 더 많으시며, 죄인을 위로

 

 

하기를 더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에게 해결책을 주시는 방법에

 

 

있어서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참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달리는 없다는 것을 아신다.

 

 

왜냐하면 죄인이 그 죄를 회개하고 버리지 아니한다면 그를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보하시지 않는다.”

 

 

 

 

그는 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영혼 구원의 조건들은 전혀 독선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조건들이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다. 각각의 조건들은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계시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이 없으면

 

 

영혼을 구원할 수 없으시기 때문에 그 조건들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은 정결케 되고 거룩해져야만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그러한 조건을 부과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하늘나라를 누릴 수가 없으며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정결케 되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구원을 얻는다. 다른 행위로는 정결케 되지도 못하고 구원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 피니가 말한 대로 구원의 조건이나 기준은

 

 

독선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 효과를 잃지 않는 최저한도로 정해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조건에 대하여 이와 달리 생각하는 자는

 

 

사탄에게 속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쏟으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당신의 임의로 구원의 기준을 낮출 수 있는데도

 

 

심술궂게 구원의 기준을 높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신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조건들은 꼭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닌

 

 

인간의 구원의 필요에 의해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께 너무 하시다고 반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반항감을 버리고 기꺼이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4. 현대 교회 안에 두루 퍼져 있는 미혹의 영

 

 

 

 

 

성경은 “미혹의 영”(요일 4:6) 혹은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

 

 

이라고 불리우는 영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영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보면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 바로 미혹의 영입니다.

 

 

마귀는 최초로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그런데 그 이후 마귀의 미혹이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마귀는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마귀는 뱀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뱀이 아니라 ‘돈’(딤전 6:10)

 

 

각종 ‘욕심’(약 1:14), ‘이적’(계 19:20),

 

 

그리고 주로 ‘이단 사설’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 24:4-5, 10-1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

 

 

하는 자임이니라.”(요이 1:7-11)

 

 

 

 

이단들은 영혼 사냥꾼입니다.

 

 

그들은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 사설을 전하기 위해 찾아오는 자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고 심지어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틈을 주거나 용기를 줄 수 있는

 

 

어떤 행동도 금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영혼들을 미혹하는데 이단자들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영혼을 사랑하고, 열성적이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많은 목회자들을

 

 

미혹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사탄의 미혹은 이단자들의 집회 장소뿐 아니라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각종 예배를 통해서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집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와 같은 말에 ‘설마!'하고 말할 것입니다.

 

 

저를 이상한 눈초리로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주장은 성경의 저자들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며,

 

 

지극히 성경적인 주장입니다.

 

 

그 증거로, 바울은 이단 집단이 아닌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미혹에 대해

 

 

여러 번 경고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 5:3-6)

 

 

 

 

이와 같이 바울은 여러 곳에서 미혹을 받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권고를 한 이유는 실제로 이런 미혹과 속임이

 

 

교회 안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런 미혹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편, 바울 뿐 아니라 사도 요한도 바울이 보았던 것과 똑같은

 

 

미혹의 위험을 교회들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펜을 들어 요한일서를 썼는데,

 

 

요한일서에는 미혹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하는 자기 점검의

 

 

시금석으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것 하나를 소개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

 

 

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

 

 

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7-10)

 

 

 

 

요한은 이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당시 교회 안에 거듭남과 관련된 심각한

 

 

미혹이 역사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이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동일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거듭남과 관련된 심각한 미혹이 현대 교회 안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 미혹의 영이 보이지 않습니까?

 

 

물론 저의 눈에도 그 영 자체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활동을 매우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미혹의 영들은 우리 귀에 익숙한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아무리 죄 가운데 산다 할지라도

 

 

적어도 부끄러운 구원은 받을 수 있다.”

 

 

 

 

오늘날의 이 말은 교회 안에서 하나의 전통적인

 

 

진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비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교회 안에서 당당히

 

 

진리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도 아직까지 이것을 진리로 오해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제가 앞에서 소개한 사도들의 경고와 이것을 서로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즉각 이러한 주장이 바울의 경고나 요한의 우려와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러한 주장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는 주님의 말씀이나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라고

 

 

말한 야고보의 말과도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미혹의 영들이 만들어 낸

 

 

거짓 교리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미혹의 영들이 역사하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속칭 ‘구원파’라고 불리는 이단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권신찬이 이 이단의 괴수였으나,

 

 

지금은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집회를

 

 

인도하고 다니는 박옥수가 더 큰 문제입니다.

 

 

이들은 거듭남에 대해서 운운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에는

 

 

거듭남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극단적이고 이단적인 칭의 사상이 주류를 이룰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 그 즉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으므로, 그 후로는 죄를 자백하거나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어떻게 살든 천국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무율법주의로 명백한 이단사상입니다.

 

 

 

이들은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그러면 언제 거듭났습니까?

 

 

당신이 거듭난 시각이 몇 년, 몇 월, 며칠입니까?”라고 질문한 뒤,

 

 

선뜻 대답을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시각을 아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도

 

 

그리고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스테판 차녹은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거듭난 시간을 알지 못하면’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중생의 본질적인 특성을 우리 안에서 발견

 

 

할 수 있다면 중생의 시간을 알고 모르고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존 스토트는 보다 설득력 있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언제였는지 날짜를

 

 

모른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날짜를 알고,

 

 

어떤 사람들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언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것을 두 번째 ‘탄생’이라

 

 

부르셨으며, 이러한 유추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육체적 탄생이 일어난 것을 의식하지 못하며, 부모님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생일이 언제인지도 결코 모를 것이다. 비록 탄생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탄생했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탄생시에 시작되었음이

 

 

분명한 그 생명을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탄생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거듭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비록 거듭난 시간을 모른다 해도 현재의 상태가

 

 

거듭난 자의 상태라면 그는 거듭난 것입니다.

 

 

반면에 설사 시간을 알고 있을지라도 현재의 상태가

 

 

성경이 말하는 거듭난 자들의 상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태를 통해서, 바꾸어 말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열매를 보고 거듭남의 유무를 분별해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가지 권면의 말씀을 여러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말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다음으로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분들에게,

 

 

그리고 이미 거듭난 분들에게

 

 

각각 한 가지씩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1) 이 말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저는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빛에 대하여 감사하라는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새로운 탄생]이라는 소책자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는 경험에 대해 잘못 배웠으므로

 

 

거듭남도 없이 죽어서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고 탄식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설교를 통해 거듭남에 관한

 

 

얼마나 명백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일찍이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말씀들은 ‘거룩한 것’이며 ‘진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가치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아무도 거듭나지 않은 분들에게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노크하시는 성령님께 갔다가 ‘내일 오라’고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스테판 차녹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바에는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낫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거듭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원초적인 진리입니다.

 

 

차녹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지금 아니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붙들고 씨름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을 통하여

 

 

문을 계속 두드리고 계신다.”

 

 

 

 

이 말 역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믿기로 지금이야말로 베드로 사도가 말한

 

 

“권고하시는 날”(벧전 2:12)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내게 달라. 그러면 내 나라를 네게 주겠다.”

 

 

이렇게 제안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스테판 차녹은 하나님이 권고하실 때 속히 중생해야 할 이유

 

 

4가지를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① 일찍 중생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기여한다.

 

 ② 일찍 중생하는 것은 자기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③ 중생을 미루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④ 시간이 가면 갈수록 중생은 더 어려워진다.”

 

 

 

이 중 네 번째 것을 설명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말을 했습니다.

 

 

 

 

“중생을 외면하면 영적 심판에 회부된다. 그리고 영적인 심판은

 

 

중생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복음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영적인 심판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지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하나님께서는 노골적인 죄에 대해서는 가시적인

 

 

심판으로 여러 번 응징하신다. 그러나 고집을 피우며 중생을 거부하는

 

 

것은 영적인 심판으로 응징하신다.”

 

 

 

 

‘영적인 심판’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성경에는 영적인 심판을 경고하고 있는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삼상 16: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7-3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4:24)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히 3:11)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이로 보건데,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도 없지만

 

 

살아 있기만 하면 언제라도 회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심판’입니다.

 

 

이러한 심판은 주로 복음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도

 

 

회개치 않은 자들에게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0-24)

 

 

 

 

이처럼 복음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도 회개치 않으면

 

 

영적인 심판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기억하고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말고

 

 

회개하고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3) 이미 거듭난 분들에게 저는 영은 거듭났으나

육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권면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6)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난 것은 우리의 영이지 육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의 영은 육을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의 반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그러므로 마치 바울이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고전 9:27).

 

 

어떤 사람들은 거듭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되는 줄로 압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존 스토트는 [변론자 그리스도]라는 뛰어난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성화가 중생의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자동적인 결과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여전히 생각

 

 

없이 행동할 수 있으며, 중대한 죄를 지을 수 있고,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고, 결혼생활에 문제를 갖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신약에서

 

 

그리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분명히 나타나며, 우리의 삶에서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서신서에는 상세한 도덕적 교훈들 - 혀를 통제

 

 

하는 것에 대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해,

 

 

솔직하고 공정하며 손님 대접을 잘하고 용서하며 친절히 행동하는

 

 

것에 대해, 성적 순결함에 대해 그리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의 상호 의무에 대해 - 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들의 권고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로 중생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들은 중생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도들은

 

 

중생한 자들이 당연히 거룩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상세한

 

 

교훈과 권고, 모범과 기도에 의해 거룩함을 이루었다.”

 

 

 

 

진실로 성화가 중생의 자연스러운 결과임에는 틀림없으나,

 

 

자동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중생은 영의 태어남이고, 영은 육과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 부분적인 모습이 아닌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자라듯이 우리의 거듭난 영도

 

 

계속 자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말씀을 섭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고, 작은 일에 충성 봉사하고,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이 되어야 하며,

 

 

나아가서 바울과 같은 아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지옥의 가는 크리스천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