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1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4 믿음과 순종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8. 01:25




4 믿음과 순종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


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네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14-26)



최초의 인간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중립 상태였습니다.


비록 그가 선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선이나 악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개입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는 중립이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이나 악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두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 증거로 오늘날까지 수십억이 넘는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했지만 그 중에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의를 행할 수 있었던


의인은 없었습니다(전 7:20).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도 이와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행하면 지옥에 간다."


말은 틀린 말입니다. 


억지 같지만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는 말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죄는 선을 통해 상쇄되는 것이 아니고 죄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인데,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즉 우리는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 2: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러나 이 말씀들은 '믿기만 하면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천국에 간다.'


의미는 아닙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말씀대로 생활하지 


않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역시 확실합니다.


이 둘은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기 떄문에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둘이 어떻게 동시에 진리일 수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원만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날은 이것을 믿고 다른 날은 저것을 믿습니다.


심지어 설교자들까지도 이렇게 설교했다 저렇게 설교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미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혼란과 미혹은 믿음과 순종,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면 아침 안개와 같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행함)에 대해 제가 오늘날처럼 이해할 수 있기까지


힘들게 걸어왔던 여정들을 소개함으로써 여러분이 단번에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구원론에 대한 의문과 깨달음의 시작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구원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믿어졌고,


지옥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도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배워서 알고 있었고,


따라서 왜 어떤 기독교인은 천국에 가고 왜 어떤 기독교인은 


지옥에 가는지 정확하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심판 날 갑자기 판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여 


반드시 천국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는 반항적인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이나 교사 선생님들이 뭐라고 설명을 하던 마태복음 7장 21절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는 말씀과


야고보서 2장 14절에 나오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는 말씀을 굳게 붙잡은 것 같습니다.


저는 누가 이와 다르게 설교하면 비록 제 나이가 어리더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영으로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의 형편은 이와 다릅니다.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설사 입으로는 인정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이런 말씀들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므로 이런 말씀들은 강조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런 무모하고 위험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개신교의 태생적인 한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오래 전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책에서 이런 글을 읽어 본 일이 있습니다.



"교회교(churchianity)와 기독교(christianity)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처럼 개신교도 역시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개신교는 구교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다면 구교에서 개신교를 


출애굽 시킨 사람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와도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교에 재학할 당시 도서관에서 윌리암 바클레이의 


주석을 뒤적거리다가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루터가 야고보서를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루터 전에도 야고보서의 정경성에 의문을 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즉 제롬(Jerome)과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글에 보면,


야고보서의 신적 권위를 의심하게 만드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야고보서에 대해 말한 것을 인용했는데


그것은 야고보서의 권위를 침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롬은 "야고보는 오직 하나의 서신을 썼다. 비록 시간 이 경과됨에 따라


야고보서가 조금씩 조금씩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야고보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고 


썼습니다.


또 유세비우스는 "야고보서는 그 명칭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보편 서신이라 일컬어지는 서신들 중 첫 번째이다."라고 썼습니다.


이 말은 보편 서신이니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의심한 최초의 말입니다.



그 후, 야고보서는 카제탄(Cajetan), 에라스무스(Erasmus),


그리고 루터(Luther)에게 더욱 혹독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카제탄과 에라스무스는 야고보서에 관심을 거의 쏟지 않았고,


루터 역시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가리켜서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무례한 평을 했습니다. 


루터의 무지와 편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그는 심지어 야고보서를 


포함하여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 무려 4권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성경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그가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 성경에 보면 


신약 성경이 27권이 아니라 23권뿐입니다.


그는 신약 성경의 정식 목록에서 야고보서와 히브리서와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을 뺐습니다.


그리고 이 4권의 책을 맨 뒤에 부록으로 수록했습니다.


그런데 아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에 보면 이렇게 경고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마르틴 루터는 셩경에 대해 지독한 무지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앞에서 말한 4권의 책이 행함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 하여


그 책들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 의해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믿음과 행함에 대한 심각한 편견과 무지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한편, 성경에서 믿음과 행함에 있어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칭의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동일 인물에 대한 서로 다른 진술을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1-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꼐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1-24)



이 말씀을 얼핏 보면 정면충돌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행위' 혹은 '행함'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오래 전에 


주의 은혜로 이 차이를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이 차이를 여러 가지 조항으로 세분하여 자세히 설명했지만


지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함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행함을 수반하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런 의미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기독교의 복음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을 믿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믿음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이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이러한 거짓 믿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행위' 혹은 '행함'의 차이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기독교 중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빈번한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복음적 순종이 칭의와 관련 있다고 말하는 것도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빈번한 주장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대 조나단 에드워드도 행위와 행함의 차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행위와 행함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 이 둘이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바울이 비판적으로 사용한 '행위'라는 단어는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 즉 '율법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롬3:20).


그러므로 이것은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의 행함'입니다.


전자는 구원받기 전에 나타나는 행위이고 후자는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행함이고, 전자는 실현 불가능하고 후자는 실현 가능하며,


전자는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있으나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와 같이 '행위''행함'은 단어는 같으나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하고 아브라함의 칭의에 대한 두 부분을 읽으면


충돌하는 것이 전혀 없고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며 상호 보완적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로마서나 야고보서에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된 내용이


하나에 의해서 다른 하나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문자 그대로 온전히 진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단순히


상급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7장 21절이나 야고보서 2장 14절 말씀을


액면 그대로의 의미로 붙잡아야 합니다.



끝으로, 릭 조이너가 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책에 나오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여러분께 들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할 때 내 백성들이 멸망 받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이 의로운 판단을 따라 살도록 나는 메신저들을 통하여 가르치게 할 


것이다. 이제 시간이 촉박하니 너는 내가 보내는 메신저들의 말을 듣고


지체 없이 순종해야 한다. 듣고서 순종치 않으면 더 엄중한 심판을 초래할


뿐이다. 이것은 의로운 심판이다. 나는 많이 받은 자로부터 많이 요구할 


것이다... 


이 세대는 지식이 늘어나는 때이다. 나의 길을 아는 내 백성들의 지식 역시


늘어난다. 너희 세대는 그 어떤 세대보다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깨달음을 따라 사는 자는 거의 없다. 나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를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내가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때가 왔다. 미지근한


자들은 내 백성들 가운데서 제하여질 것이다. 나를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진심으로 나를 믿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내게 불순종해도 괜찮다는 것을


자기들의 삶을 통해 내 백성에게 가르치고 있다."



제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지체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찰스 피니에게 큰 빚을 지다!



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며 그런 믿음으로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원론에 대한


몇 가지 의문과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여러 책을 읽었으나 그 어느 책에서도 제 마음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시원한 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실망이 되풀이되자 이제는 책이나 설교를 통해


나의 의문을 푸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지지가 않았고 


체념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찰스피니의 자서전을 읽다가 저는 매우 흥분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의 습관은 항상 복음과 그 최선의 적용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과


날짜를 잡아서 설교를 준비하지는 않는다. 나는 항상 복음의 진리와 그것의


적용을 위한 최선의 길을 묵상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찾아낸다. 그런 다음 성령의 조명 밑에서 그들의


당면한 필요를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주제를 택한다. 그것에 대해 집중


적으로 묵상하고 일요일 아침에는 그 주제를 놓고 많은 기도를 한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운 다음, 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쏟아 놓는다...



나는 엄숙히 말할 수 있다. 설교 원고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훨씬


더 많이 연구했다고 말이다. 나는 설교하고자 하는 주제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만 했으며, 나의 마음을 그것으로 채워야만 했고, 그런 다음에는


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야만 했었다. 나는 가장 간략한 방법으로


그리고 설교 중에는 사용하지 않을 말로 주된 요점을 기록했다. 



내가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에는 이것조차 하지 않았다. 내 사역의 초기


12년 동안 나는 단 한 언어도 기록해 두지 않았으며, 기도 중에 얻은 것 

 

외에는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서 설교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설교했으며 성령께서 본문을 주시고 그 주제를 내 마음에 전개시켜


주시는 대로 설교했다. 내가 영감에 의해 설교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교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관적인


확신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과 단어와 예증의 덩어리는,


전달될 수 있는 만큼 빠른 속도로 나에게 몰려왔다. 처음으로 설교의 요약을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그것을 설교 전이 아니라 설교 후에 기록했다.


그것은 내가 받은 사상의 대략을 보존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설교할 때에는 그 요약들을 제구성하고 또 성령께서 주시는 신선하고도 


새로운 사상을 덧붙여야만 그것을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에 설교 주제를 얻는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설교 주제를 받을 때는 마음에 너무나 큰 자극이 오기 때문에 떨면서 겨우


그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나에게 흔한 일이었다. 몸과 영혼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주제가 나에게 주어지면 수분 안에, 성령꼐서 


제시하신 관점을 뒷받힘할 수 있는 요약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한 설교는 


항상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저는 찰스 피니의 이러한 고백을 읽으면서 감동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임할 때의 저의 체험과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니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구원론에 대한 참 진리를 알기 위해 책을 읽었지만 실망만 하였다.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저자들은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하여 해답을


주기는커녕 그것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기 내가 하나님꼐 


말씀을 받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이 있구나.


더구나 그는 한 시대에 대표적으로 하나님꼐 쓰임을 받은 인물로 


나와 비교할 수도 없는 영적 고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틀림없이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독교서점에 가서 제목도 보지 않고 


찰스 피니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습니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나는 찰스 피니의 책을 읽으면서 궁금해 하던 것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눈이 밝아지고 이해력이 증진되었고, 성경의 의미들을 보다 


명백하게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할 수만 있으면 찰스 피니의 모든 책을 읽으라고 


여러분께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책을 읽는 것의 몇 배나 되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그의 책에 나오는 믿음과 순종에 관련 있는 


중요 부분 몇 가지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찰스 피니가 쓴 [구원에 이르는 회개](은성)라는 책에 보면


'믿음으로 얻는 칭의'라는 설교가 나옵니다.


그 설교에서 세 부분을 여러분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찰스 피니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칭의란, 믿음이 개인적인 성결의 대용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는 임의적인 규정에 의해 믿음이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순종을 대신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혹자는 칭의란, 개인적으로 거룩해야 할 필요성을 없앤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임의적으로 면제 


시키시고 그 대안으로서 믿음을 제시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의롭게 하는 믿음은 효력이 있기만 하다면 바로 거룩함입니다.


그것은 마음과 생활의 거룩함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는 자에게 거룩함


대신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 자체가 됩니다."



저는 과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약 시대 때는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았는데 지금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라고


말하는 설교자나 성도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마치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율법을 대신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로마서 10장 4절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그렇게 생각하는 바,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 존 스토트가 잘 지적한 대로 


"이제는 칭의뿐 아니라 성화도 율법적인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뜻입니다. 


즉 이 말은 믿음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이 율법을 지키는 비결이 됨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 31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2) 찰스 피니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을 얻는 칭의란, 죄인이 '선한 행위나 개인적인 거룩함'(회개나 믿음에


따르는 복음적인 순종을 의미함 -저자 주-) 없이도 회개나 믿기만 하면


의로워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혹자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가 선행이나 거룩함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 바,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크게 강조한 바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바울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서 칭의를 얻기를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오류를 지적하여 항의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칭의는 율법의 행위가 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행이 칭의에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그릇된 이론이 침투하여 들어왔을 때에 야고보는 그 문제를 채택하여


그들이 바울을 오해했던 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1-24) 



이 서신은 바울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리고 고대 교회 중


일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사상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말한 행위와 야고보가 말한 행위가 서로 별개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적인 동기로 행해진 행위에 관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서 믿음이나 믿음의 의로움에


근거하는 선행을 줄 곧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는 율법의 행위나 율법적인


동기에 기초를 둔 행위들이 칭의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견해를 


부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만, 또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의 행위가 어울려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친 것도 동일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또는 바울이 표현했듯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의롭 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친 것도 동일한


사상을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율법적인 칭의와는 전혀 다른 


복음적 칭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적 칭의,


또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용서와 용납됨에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과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다는 말은 그들이


이 율법을 근거로 용납된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의 행위 때문에 


마치 그들이 의로운 것처럼 취급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실 때 택하시는 방법입니다.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닙니다.


그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죄인들이 용서받고 용납되며


의롭다 함을 얻는 방법은 이런 것입니다. 즉, 그들이 회개하고 믿고 거룩해지면


그들의 과거의 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될 것입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오해하기가 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열린 마음으로 끝까지 잘 읽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저는 피니나 예레미아스 교수처럼 칭의를 단순히 죄 용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글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도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피니가 말한 칭의의 방법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참된 것입니다.


칭의는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를 수긍하는 사변적인 믿음을 가진 


자에게가 아니라 회개하고 믿고 거룩해지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회개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믿고 거룩해지지 않으면 칭의를 받지 


못한다니 그런 말은 금시초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두 군데의


성경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하려고 합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난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6-18)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9-11)    



보십시오. 주님이 친히 바울에게 믿으면 거룩해진다고 하였고,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묘사하기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거룩함을 의롭다 하심보다 먼저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피니의 말은 잘못된 주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것은 여러분에게 가장 생소한 진리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다른 모든 내용과 마찬가지로 이것까지도 결코 새로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증거로, 존 라일 감독은 [거룩]이라는 그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화와 칭의를 결합시키셨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듯하다. 성화와 칭의는 분명히 구별되는 상이한 것이지만,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므로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은 모두 거룩하게 되며, 모든 거룩한 사람들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결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려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성화의 표시를 소유하지 못했다면 당신의 칭의에 대해 말하지 말라."



또 찰스 하지는 [생명의 길]이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거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룩은


그것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원칙적으로 이런 마음의 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구세주이신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해지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죄 가운데 거하면서도 여전히 구원받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마치 사람이 병 중에 있으면서 동시에 건강할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모순된 것이다. 구원의 상태는 바로 거룩의 상태인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구원은 그저 죄의 형벌에서 건져내는 것만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구해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육체의 소욕과 마음의 악한 욕심의 종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어떠한 교파에 속해 있든, 우리가 어떠한 특권이나 전문 지식을


갖고 있든, 마음과 삶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지배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되기를 소원하지 않는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지 않고 그리하여 성령께서 항상 만들어 내시는 사랑과 


희락과 평강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를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인도 아니며, 또한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성경은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시기심 많고 부정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여졌으며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聖徒: 곧; 'saints', '거룩한 자들') 들이다."



마지막으로, 스태반 차녹은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절대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義)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의는 원래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의(義)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의로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만큼이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고려해 볼 때, 어떤 사람의 의지가 전혀 변하지 않았고,


비록 지금 당장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지 속에서 죄를 범하겠다는 


상습적인 고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이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윤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도 죄를 범한 사람이 죄에서 돌이키고 이전의 성향으로 희귀해야


용서받기에 매우 적합하게 됩니다.



칭의와 중생은 떼어 놓으려 해도 떼어 놓을 수없는 것이면서도, 


또한 서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중생은 우리 '내면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 두 가지 모두의 기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가지 모두의 공로적 원인이 되십니다.



칭의는 성부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것이고,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칭의는 성부 하나님의 선언이요,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관계적인 변화와 실제적인 변화는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 두 가지가 늘 함께 간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다음 대지에서 보다 충분하게 설명할 것입니다만, 


여러분이 오해하지 않도록 의롭다 하심 전에 오는 '거룩함' 에 대해 


부연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서 말한 '거룩함'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내적인 거룩을 의미합니다. 


즉 웨슬리 듀웰이 잘 표현한대로 믿고 난 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성화가 아니라 '초기 성화' 를 의미합니다. 


초기 성화란 회개하고 거듭날 때에 즉각 이루어지는 심령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심령의 변화 없이는 회개가 회개일 수 없고 


거듭남이 거듭남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심령의 변화가 곧 바울이 말한 거룩함인데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롭다 함은 회개하고 믿고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찰스 피니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나 사랑 또는 다른 은혜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용서의 근원인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거나, 


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매개체, 또는 도구로 하여 의롭다 함을 얻을 뿐입니다. 


왜 다른 마음의 작용들이 아니라 믿음이 그 수단으로 지정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믿음의 본질과 효과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작용은 칭의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어떤 작용 때문에 믿음이 칭의의 매개체가 된 것일까요?



먼저, 조나단 에드워드의 답을 들어봅시다.


피니 뿐 아니라 조나단 에드워드도 [기독교 중심]이라는 


그의 책에서 "믿음 자체도 하나의 미덕이요 우리에게 있는 선함의 일부분...


인데, 어떤 이유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는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믿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이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믿음 안에 존재하는 그 어떤 탁월함이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이 맺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데, 믿음은 바로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찰스 피니는 믿음이 정의의 매개체로 선택된 또 다른이유를 


제시했는데 그는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케 하는 바 하나님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칭의의 수단으로 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화를 이루는


자연스러운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돌이켜 순종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귀향의 축복을 얻는 수단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둘의 주장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하나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소개한 글의 뒤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의 연합을 다음과 같은 연합에 비유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연합되어 있는 것,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연합되어 있음으로써 머리에 있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무 가지가 나무에 연합되어 있는 것. 나무 가지가 나무의 


수액과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무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연합되어 있는 것. 아내가 남편의 모든

소유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남편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 순종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듯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나무 가지가 나무의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에게 


붙어 있어서 나무와 연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칭의의 매개체로 선택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지가 나무를 떠나선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접 붙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반대로도 진리입니다.


즉 누구든 주님께 믿음으로 접붙이고 있으면 반드시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노라 하고 복음적인 순종이 없는 자는 


실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믿어 순종케”(롬 1:5) 되어야 합니다.


 

 

 

3.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을 읽고 균형을 잡다.

 

 

저는 주일학교 때부터 야고보서 2장 14절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리고 피니의 책을 접하면서부터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하여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문이 저의 가슴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25)

 

 

저는 이 구절들을 설명할 때에

 

 

“기독교의 교리에 동의하는 사변적인 믿음으로는 절대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으며, 행함이 따르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

 

 

가르쳤습니다. 물론 이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행동을 한 것은

 

그가 의롭다 함을 얻은 지 약 30년 후의 일입니다.

 

그리고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가게 한 것도 혼자서 은밀히

 

믿음을 갖고 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근거로 처음부터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뭔가 부적절하다는

 

석연치 않은 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비교적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조나단 에드워드의 [기독교 중심]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책에서 오래도록 제가 간직하고 있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은 글로 자신의 논증을 시작합니다.

 

 

“우선 누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즉 ‘이로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라는

 

사도 야고보의 말에서 ‘믿음’ 이라는 단어와 ‘의롭다 하다’ 라는

 

사도 바울이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의미로 해석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도 야고보의 취지는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서 가르쳤던 이신칭의 교리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가 각각 사용하고 있는 믿음’

 

‘의롭게 하다’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로 해석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쪽의 주장은 다른 쪽의 주장을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반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두고 한쪽은 긍정하고

 

다른 쪽은 부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장에서 인용하는 몇몇 구절에서 발생하는 논쟁의 관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사용한 '믿음' 과 '의롭게

 

하다' 라는 단어 중에서 어느 단어를 사도 바울이 사용한 의미와 다르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을 먼저 해결해야 반론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 조나단 에드워드는 어떤 이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라고 말하나 사실은 ‘의롭게 하다’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아쉽게도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한 가지 착각을 하였습니다.

 

1대지에서 이미 말한 대로 야고보와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행위’ 혹은 ‘행함’이라는 단어 둘 다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14절과 19절이 그 증거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러나 야고보서 2장 24절에 나오는 “이로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는 말씀과 같은 경우

여기에 나오는 믿음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주장처럼 바울이 말한

믿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둘 중의 하나만 다른 의미라고 본 에드워드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다단 에드워드의 글을 통해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믿음’행위’아니라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도

 

바울이 사용한 것과 야고보가 사용한 단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글과 야고보의 글에서의롭다 하다’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사용되었을까요?

 

 

먼저,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을 일부 인용하겠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인정받고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인정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언적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

 

지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칭의는 우리가 재판장이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인정받고 받아

 

들여지는 것이나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양심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된 선고문이나 판결문을 통해 우리가 그렇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표명되는 것입니다. 만일 칭의가 전자의 의미로 해석된다면, 다시 말해서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받는 것 자체로 해석된다면, 우리를 옳다

 

인정받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주는 것만이 칭의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칭의가 후자의 의미로 해석된다면, 다시 말해서 그렇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의

 

표명으로 해석된다면, 우리가 그렇게 인정받을 만한 가치와 자격이 있다는

 

것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모든 것들이 칭의의 근거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오직 믿음만 칭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받고 열납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에 적합

 

하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모든 것이 다 똑같이 칭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칭의를 후자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믿음이 아닌 모든

 

미덕들과 선행들도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믿음과 동등하게 칭의와 관련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미덕들 곧 모든 거룩한 행실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고 옳다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음과 동일하게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입으로 표명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는 언제나

 

이 두 가지 의미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표명된 일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는

 

때로는 전자의 의미로, 때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같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내적인 반면에 후자는 그 내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차이뿐입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모든 나라 사람들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일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다른 면에서는 두 가지 개념이

 

모두 일치하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외적으로 표현해 주고

 

선언해 준다는 면에서만 차이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그 두 가지 개념에

 

똑같은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입니다.

 

 

가령, ‘판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단어의 경우,

 

때로는 우리 생각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판단만을 의미하고,

 

또 때로는 생각 속에서 이루어진 판단을 외적으로 증거하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롭다하다’, ‘정죄하다, ‘받아들이다’,

 

‘내어쫓다’, ‘멸시하다’, ‘인정하다’, ‘부인하다’라는

 

단어들도 때로는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의미하고,

 

때로는 그것이 외적으로 표현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드는 사도 야고보가 선언적 칭의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칭의를 선언적 칭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때,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옳습니다.

 

마치 나무가 좋은 나무임이 밝히 입증되는 것은 나무를 직접 진찰해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나무에 맺히는 열매를 보는 것으로도 가능한 것처럼,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밝히 입증되는 것도 똑같다는 말입니다.

 

 

사도 야고보의 취지를 생각할 때 이러한 견해는 더욱 힘을 얻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오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있어서 선행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만일 자기들이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이신 줄 믿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을 믿으며

 

세례를 받았다면, 그것만으로 자신들의 구원은 안전하며

 

이제는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도 야고보의 목적은

 

분명히 이런 오류와 반대되는 진리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사도 야고보의 말을, “행위가 증거물의 자격으로 그리고 선언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를 의롭다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맥을 정확하게 숙고해 볼 때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야고보는 여기에서 행위를 강조하되 믿음의 필수적인

 

증거와 표시로서 또는 믿음의 참됨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문맥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가령 야고보서 2장 1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믿음에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도 야고보의 취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야고보는 ‘오직 믿음!이라는 진리를 허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믿음뿐만 아니라 순종으로도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도 야고보의 저술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야고보의 취지였습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오직 믿음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논리를 볼 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행위가 우리 칭의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 믿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행위를 말하되 믿음과 관련된 것으로서만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믿음만이 유일하고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동일하게 우리의 칭의에 관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들이 칭의의 조건으로 언급된느 것은 그것들이

 

믿음의 여러가지 표현과 증거라는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

 

사도 야고보의 말은 “행위가 증거의 자격으로만 그리고 선언적인

 

심판의 자리에서만 우리를 의롭다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 2장 21절에서 더 심층적으로 확증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진실함을 인정하신 사건, 즉 하나님 자신의

 

판단을 선언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 행위는 하나의 증거로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를 나타내는 말씀을 볼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칭의는 증거의 자격을 가진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임이 분명합니다.

 

신약성경 중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의 실례가 언급된 다른 곳을 봐도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분명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즉, 참 믿음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기 전부터 아브라함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수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행위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선언적인

 

의미로서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편,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2장 25절에서 또 다른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읍을

 

전멸시키되 기생 라합은 살리라고 명하셨을 때 라합을 신자로

 

인정하신, 하나님의 선언적 판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 2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음으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준 일은

 

라합에게 있는 믿음의 증거와 표현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야고보 사도는 라합의 인생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에서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라합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라합을 신자로 특별하게 인정하신

 

선언적 칭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행위를 믿음의 행동이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행위는 우리의 칭의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몸의 움직임과 활동이 몸에 있는

 

생명의 표현이듯 믿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표현이

 

행위들로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에 나오는 것을

 

요약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설명한 후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신칭의 교리가 방탕한 생활을 조장한다는 반론이 자주 제기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함이나 탁월함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성경적 칭의 교리는

 

진실하고 복음적이며 총체적인 순종의 필요성이나 유익을 결코 감소

 

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안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순종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고 사람의 저주도 순종의

 

결핍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저주를 받는 것은 순종의 결핍

 

때문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순종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순종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요

 

원을 위해 꼭 필요한 준비입니다.

 

 

영원한 축복들은 순종에 대한 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 자신의 양심

 

안에서 그리고 최후 심판 날에 우리의 칭의가 표명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을 상태에 있다는 합당한 증거인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 영생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우리를 받아주실 때조차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순종을 고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마치 우리가 순종의 도덕적 탁월함을 인해

 

의롭다 함을 얻기라도 하는 것처럼 순종에 철저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이 복음 체계는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그 어떤 복음 체계만큼

 

방탕한 삶을 억제하며 완전하고 총체적인 순종과 가장 탁월한 거룩함을

 

촉진시키고 격려합니다. 아니 실제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능력

 

있게 방탕한 삶을 억제하며 완전하고 총체적인 순종과 가장 탁월한

 

거룩함을 촉진시키고 격려합니다.“

 

 

이제 지금까지 나눈 말씀들을 온전히 흡수하여 나의 것으로

 

만들이 위해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나 ‘행위뿐 아니라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도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판단은 하나입니다.

 

‘생각으로 한 판단’‘입으로 한 판단처럼 ‘의롭다 하다’라는

 

두 단어의 의미도 사실상은 하나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둘은 칭의의 서로 다른 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의롭다 하다’라는 말을 전자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바울이 말한 ‘의롭다 하다’도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적인

 

선언을 의미하나,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께서 심령을 꿰뚫어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고 선언하시는 것이지 믿음의 증거인 행위를 보고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 경우 칭의의 조건이 되는 것은 복음적 순종까지도

 

배제된(그것을 씨앗으로 품고 있기는 하지만) 오직 믿음 하나뿐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믿음은 단지 복음 진리에 대한 지적 수긍이나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고,

 

그리고 새 삶을 위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바로 그런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씨앗 혹은 뿌리의 형태로 그 안에 있으며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여기에 아직 가시화된 행위가 들어가 있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최초의 순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맞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를 후자의 의미

 

(선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믿음에 나타남이요

 

증거인 복음적인 순종(행함) 역시 칭의의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된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구분과 이해가 왜 중요합니까?

 

이것은 의외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진리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으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게 해 주고,

 

결국 ‘교리‘생활’ 모두를 바르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어렵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저는 독자 여러분에게 이 설교의 3번째 대지를

 

충분히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을 것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나 찰스 피니는 강력한 부흥의 중심부에 있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성령만을 갖고 있지 않았고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

 

밝히 보게 된 구원에 관한 대낮 같은 진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부흥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참된 회개로 인도하였고 구원하였습니다.

 

 

누군가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무디는 80만 명을 전도했고 찰스 피니는 50만 명을 전도했다.

 

그런데 무디의 회심자들의 80%는 세상으로 돌아갔고 피니의

 

회심자의 80%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앞으로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부흥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큰믿음교회를 사용할 것입니다.

 

전에 저는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왜냐하면 큰믿음교회에는 구원에 관한

 

대낮과도 같은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조용기 목사님이 예언한 대로 실제로 팬사콜라 브론스빌교회를

 

사용하셔서 큰 부흥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금세기 최고의 부흥이라고 일컬어지는 부흥의 진원지인

 

팬사콜라 브론스빌교회는 우리 교회와 같은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제 또 다시 주님은 큰믿음교회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대부흥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흥이 단순히 성령운동 혹은 은사운동으끝나지 않고

 

 

대낮같은 구원의 진리가 도시와 나라와 열방으로

 

퍼져 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엄청난 숫자의 회심자가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무더기로 생겨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 속히 주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 변승우 목사님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