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1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5 거듭남 (1)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8. 01:23

 

 

 

 

 

5 거듭남(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니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1-8)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 대장은 그 시대의 기독교회들에게서

 

본 위험 요소 6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① ‘성령 없는 종교’

 

②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

 

③ ‘회개 없는 용서’

 

④ ‘거듭남 없는 구원’

 

⑤ ‘하나님 없는 정치’

 

⑥ ‘지옥 없는 천국’

 

 

윌리암 부스가 지적한 이와 같은 위험 요소들은 현대 교회에도

 

신기할 정도로 딱 들어맞습니다.

 

특히 교회 내에서 ‘회개 없는 용서’‘거듭남 없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이제는 위험 수위에 도달했습니다.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거짓된 종교라고 본다... 교회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고, 거듭나지도 못했으며, 회심하지도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필요한 설교 중의 하나는 바로 

 

거듭남을 촉구하는 설교입니다.

 

 

 

1.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려면 

 

거듭남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먼저, 거듭남은 죄 사함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는 다른 사건입니다.

 

거듭남은 결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책(심판과 정죄)

 

에서 자유케 되는 그것이 아닙니다.

 

 

또, 거듭남은 신분의 변화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거듭남이 단지 하나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되는

 

것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듭남에 따르는 결과 중의 하나일 뿐,

 

거듭남 자체는 아닙니다.

 

거듭남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인데, 

 

신분의 변화가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또한, 거듭남은 개종이 아닙니다.

 

개종이란 종교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종교를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꾸었다고 해서

 

그가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박사는 “개종하기는 하였으나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개종이 아닙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부분적인 개선이나 변화가 아닙니다.

 

거듭남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거듭난 사람을 새로운 입 혹은 새로운 손이라고

 

부르지 않고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새로운 탄생]이라는 소책자에서

 

거듭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입교,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 물세례, 성찬식에 참여함,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 교회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믿음의 정통성, 교회에 가는 것, 

 

기도하는 것, 성경 읽기, 도덕적인 것, 교양이나 세련됨, 선한 일을 행함, 

 

최선을 다함, 그 외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들, 

 

이런 것들이 새로운 탄생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거듭남에 관해 함께 나누었던 

 

니고데모는 우리가 위에서 열거한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들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그럼 거듭남은 어떤 것일까요?

 

 

 

(1) 거듭남은 ‘영의 재탄생’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거듭남은 니고데모가 착각한 것처럼 육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인간에 대해 “사람은 영이고 혼을 가지고 있으며

 

몸 안에 산다.”고 하면서 거듭남은 “인간의 영의 재탄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거듭남은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2) 거듭남은 ‘영의 부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4-25)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1-5)

 

 

세계적인 유명한 전도자 T. L. 오스본은 [거듭남의 비결]이라는

 

책에서 “한 사람이 거듭났다거나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은 곧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오스왈드 스미스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책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죽음에서 나와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타락은 인간의 영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이 때 하나님이 언급하신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입니다.

 

만약 이것이 육체의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 날 그 즉시

 

아담과 하와가 죽었을 것입니다.

 

‘정녕’이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를 내포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시간에 죽을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시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경고하신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입니다.

 

 

그 때 이후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육체는 살아 있지만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은 다시 살아나야 되는데,

 

이 영의 부활이 곧 거듭남입니다.

 

 

 

(3) 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 외에도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묘사한 말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출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듭남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줍니다.

 

 

첫째는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본성’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을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증여받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T. L. 오스본은 거듭남에 대해 정의하기를

 

“거듭남은 당신 안에서 태어나는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명을 갖는 영광스러운 체험”이라고 했고,

 

존 스토트는 “중생은 심오한 내적 변화요,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심기움이요 새 성품의 증여요 새 마음의 선물”이라고 했고,

 

작고한 존 윔버는 “중생이란 개념은 ‘칭의’라는 법적 용어를 뛰어넘어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중생하게 되면

 

죄를 좋아하는 본성은 근원적으로 변화 받게 된다. 우리의 겉사람은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새로운 본성을 주시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갈 6:15).

 

이것을 중생 또는 거듭남이라고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씨”라는 의미심장한 단어가 나옵니다.

 

거듭난 자 속에는 하나님의 씨가 거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씨 때문에 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씨”는 무엇일까요?

 

식물이나 동물이나 다른 모든 생명체의 씨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씨 역시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생명이요, 둘째본성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 속에 하나님의 씨가 거한다는 말은 거듭난 자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이 거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연하며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거듭남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8)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고전 7:14)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계 20:6)

 

 

이 말씀들에 나타나는 거룩함은 모두 거듭남 자체, 혹은 거듭남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성서대백과에 보면 “거듭남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요,

 

칭의는 사람을 의롭다 칭하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거듭남에 대해

 

잘 정의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거듭남은 칭의와 달리 우리를 법적으로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를 실제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5) 거듭남은 ‘인간의 재창조’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 6:1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유명한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중생은 성령에 의하여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내적으로 재창조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은 하나님, 인간, 자연에 관한 그의 명상을

 

기록한 [실재와 종교]라는 책에서 거듭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성격을 많이 닮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어린이는 또한 주위의 영향을 받는다. 즉 그들이 항상 접촉

 

하는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나쁜 부모를

 

가지고 그 위에 나쁜 환경 속에서 자란 자가 악인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모든 사정이 그로 하여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런 어린이가 착한 사람으로 변했다고 하면 그것은 큰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이러한 기적이 적으나 많으나

 

간에 어디서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찾아보게 된다. 이들 기적은

 

인간을 죄의 사슬에서 풀어 회개시키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숨은 위력이 존재해 있다는 것을 존재한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숨겨진 큰 힘은 성령이다.

 

 

이 세상에는 국가로부터 엄한 형벌을 받고도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

 

많은 죄인들이 있다. 또 그들은 사랑하는 부모나 친구들의 충고도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여러 가지 수단으로 그들을 개선하려고 해도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때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어 실로

 

순간에 변화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기주의자로 죄 가운데 살던 자가

 

그 생애가 변하여 남을 위해 도우며 남을 위해 일한다. 이제까지 사람을

 

박해하고 살인하던 자가 남을 위한 일로 박해를 받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된다. 이것을 거듭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18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데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 18:1-4)

 

 

토기장이는 그릇을 빚다가 금이 간 것을 다시 빚어서 만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손수 빚어서 만든 그릇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파상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손”(눅 11:20)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다시 빚어서 만드십니다.

 

이것이 곧 거듭남입니다.

 

 

이상 여러분께 거듭남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1) 거듭남은 ‘영의 재탄생’입니다.

 

(2) 거듭남은 ‘영의 부활’입니다.

 

(3) 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4) 거듭남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5) 거듭남은 ‘인간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이제 거듭남에 대해서 바로 아시고

 

모두 참으로 거듭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왜 거듭나야만 하는가?

 

 

거듭나야 할 이유와 필요는 다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타락

 

 

사무엘 홉킨스는 거듭나야 하는 근거와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들이 중생해야 할 필요성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자연인의 비행과

 

마음의 부패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마음이 부패해 있지 않다면,

 

그는 구원받기 위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도, 또한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할 필요성도 없을 것이다.”

 

 

타락은 우리가 거듭나야 할 가장 중요하고 실재적인 이유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잘 나타납니다.

 

창조의 6일째 되던 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

 

(창 1: 26-27)하셨습니다.

 

인간은 불멸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해력과 여러 가지 감정과 의지의 자유를 가진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사랑이 충만하였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과 사고와 언어와 행동의 유일한 원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흠 없이 순수하신 것처럼 모든 죄악이

 

오점으로부터 순결하였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만물과 인간에 대해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모든 존재는 선하게 지음 받았으나, 더할 나위 없이

 

선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부패하기 쉽다.”고 말한 것처럼,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지만

 

불변하게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시험에 견딜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타락하기 쉬운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인간에게 깨우쳐주시고 이에 대해

 

엄숙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러자 “네가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인간에게는 죽음이 따라붙었습니다.

 

육신은 영혼과 분리될 때 죽고, 영혼은 하나님과 분리될 때 죽습니다.

 

인간의 죄는 먼저,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의 분리

 

그로 인한 영적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박탈당하고, 불행하고 불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마귀의 형상인 교만과 아집에 빠지게 되었고

 

멸망할 짐승의 형상인 관능적 욕구와 정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대신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힌 채 마귀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고, 관능적 욕구와 정욕 속에서 짐승의 형상을 지니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 속에서 태어난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여자로부터 태어난 모든 인간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필요한 첫째 이유입니다.

 

 

 

(2) 거룩

 

 

존 웨슬리는 “거듭남은... 성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거듭남은 성결을 위해서 절대 필요하다.”고 했고,

 

다른 곳에선 “거듭남은 성화로 들어가는 문이고 통로이다.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그때 우리의 성화, 즉 우리의 내적이고 외적인 성결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그 이후부터 우리는 점차적으로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썬다 싱이 쓴 [그 발 앞에 엎디어]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 다만 그 자신과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미련하고 불합리한 생각이다. 세상의 지배자나 도덕 교사들은

 

말하기를 ‘선을 행함에 의하여 선하게 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선행을 하기 전에 네 자신이 먼저 선하게 되라.’고 한다. 그 마음이

 

변하고 거듭나면 선행은 결과적으로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쓴 나무가 자주 결실하므로 인하여 마지막에 단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은

 

미련한 자의 말이다. 쓴 나무는 단 나무에 접붙임 받음으로써 비로소

 

달게 된다. 단 나무의 기운과 물이 쓴 나무에 흘러들어가서 그 성질을

 

완전히 변화시켜 달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새로운 창조’다(고후 5:17). 그처럼 죄인은 선행을

 

하려고 하나 항상 악한 결과만 나타난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에게 접붙임 될 때에는 내 안에서 옛사람은 죽어 없어지고 새롭고

 

거듭난 사람이 된다. 이 구원으로 인하여 새 생명의 뿌리에서 나오는

 

결실이 선행이 되어 나타난다.”

 

 

오스왈드 스미스 박사는 거듭남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설명했습니다.

 

 

“당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당신은 왜 죄를

 

짓습니까? 당신의 됨됨이 떄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것을 당신이 합니다... 왜 개들이 짖으며 수탉들이 울며 고양이는

 

야옹거립니까? 그들은 결코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자연적인 방법으로 그들이 하는 것을

 

합니다. 당신은 한번도 개가 야옹거리거나 고양이가 짖는 것을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는 개의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짖습니다. 수닭도 똑같은 이유 때문에 울며 고양이들도 그들이 고양이이

 

이기 때문에 야옹거립니다. 이것들이 그들이 속한 가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것을 합니다.

 

 

당신은 전에 소들과 말들이 일어서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소는 어떻게 일어나는 가요? 만일 당신이 농장에서 산 적이 있다면

 

당신은 알 것입니다. 소들은 언제나 그들의 뒷발로 먼저 일어섭니다.

 

그러나 당신은 말이 그 뒷발로 일어서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을 것

 

입니다. 말들은 그들의 앞발로 일어섭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습니까?

 

오직 그들의 천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천성은 죄 짓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속에 새로운 천성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을 것입니다. 우리의

 

옛 천성은 그 자체를 나타낼 것입니다. 이것이 달리 되는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것은 새로운 천성을 의미하며 그리고 우리가

 

거듭나고 그래서 그 새 천성을 받기 전까지는 결코 달리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 태어나야 할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남에 대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썼습니다.

 

거듭남은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없이는 그 누구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라는

 

말씀에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3) 행복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사 32:17)입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였느니라.”(사 48:22)라는 말씀대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롬 2:9) 있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악이 그를 징계하겠고 그의 패역이 그를 책할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이 곧 고통”(렘 2:19)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2:1)라고 밝힌 후 곧이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여러 가지

 

죄악들을 지적한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말세가 되면 될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집니다.

 

행복해지려면 죄를 버려야 하며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거듭남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생은 모든 참다운 기쁨의 원천이다. 우리의 첫 번째 탄생 때 우리는

 

울면서 세상에 나왔지만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탄생에서는 환희의

 

근거가 있다.”

 

 

또한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조차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치로 본다면 거룩하지 않은 자가 행복하게

 

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악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불경건한 성품은 불안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악의, 미움,

 

질투, 투기, 복수심은 마음속에 현재적인 지옥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적절한 한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유순한 정열조차도 기쁨보다는 몇

 

천배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영혼에서건 죄가 지배하고

 

있는 한 행복은 그곳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본성의 경향이 변화되기 전에는, 즉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를

 

지배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거듭남은 장차 올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현세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4) 천국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한 번만 태어난 사람은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둘째 사망인 지옥(계 21:8)에 던져지게 되므로 두 번 죽고,

 

거듭나므로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육신의 죽음은 경험할지라도

 

둘째 사망인 지옥에 던져지지 않고 천국에서 영생하게 되므로

 

한 번만 죽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거듭나야 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여기서 “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이돈’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블레포’ 와는 달리 ‘경험하다’. ‘참여하다’

 

또는 ‘인식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2-4)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하늘나라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자연적인 생명은 거기에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물고기에게 주어진 생명은 그로 하여금 물 속에서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새의 생명은 그것으로 하여금 공중에서 생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은 하늘나라에 적합한 유일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서 생활하려면 반드시 이 땅에 있을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3.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는가?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요?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이건 합니다만 거듭남의 비결을 알기 원하는 자들에겐

 

오히려 본문 9-15절 말씀이 더 도움이 됩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거듭남의 비결로 ‘믿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거듭남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이 거듭남의

 

비결로 지금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인간의 몫 즉 인간이

 

담당해야 할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원하는 자에게 더 도움이 되는 

 

보다 직접적인 비결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 거듭납니다.

 

즉 우리가 믿으면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럼 거듭남에 요구되는 이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일까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이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1절은 예수님이 왕(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유대 땅을 “자기 땅”, 유대인을 “자기 백성”이라고

 

각각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은 믿음은 영접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해 알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모셔 들이되 구주로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지배자인

 

임금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12절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인 사람만이

 

거듭난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에 관하여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것은 거듭남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으로

 

요한일서에 아주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사실을 왜 지적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주장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거듭남을 아기가 태어나는 것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아기가 힘을 쓰느냐? 엄마가 힘을 쓰느냐? 엄마가

 

힘을 쓰고 아기는 가만히 있어도 태어난다. 이와 같이 거듭남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날 때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우리는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믿으려고 하면 믿어집니까?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얻으려면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들어야 하고(롬 10:17),

 

죄를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려는 능동적인 의지를 가지고

 

주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에이든 토저는 ‘개혁 없는 중생은 없다’라는 제목의 탁월한 글에서

 

지극히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도덕적 개혁이 있을 때까지는 영적 중생이 있을 수 없다... 죄인이

 

자기의 생활 방식을 기꺼이 개혁하려고 하지 않는 한 그는 중생의

 

내적 체험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인기 있는 복음주의

 

신학의 나무 밑에서 잃어진 지극히 중요한 진리이다.”

 

 

사무엘 홉스킨도 ‘중생과 회심’이라는 글에서 이와 유사한 말을 했습니다.

 

 

“모든 독자들에게 내가 경고해 두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책망하실 모든 일들을 깨우치고 인간이 마음으로부터 제거해 버리지

 

않는 한, 또한 그 마음속에 언제든지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생명과 거룩함의 원칙들을 새겨 두지 않는 한 결코 중생하지

 

못한다.”

 

 

그리고 T. L. 오스본 역시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거듭남에는 의지의 결단에 의해서 죄에서 돌이키는 내면의 변화와

 

목적의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능동적인 의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능동적인 의지만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의 수단’(믿음이나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인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것, 자백, 기도 등의

 

노력을 의미함)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토마스 맨톤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은혜의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구하는 일은 중생의 과정에 있어 준비 단계입니다.

 

그는 “사람이 전적으로 무능하지만 그래도 외적 방편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에 보면 비록 사람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해야 되는 이유 4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이건 그것을 얻기

 

전에 간절히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확신하게 될 때까지는 하나님의 손에서 간절한 심정

 

으로 도움을 결코 구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 힘에 겨운 짐을 들어

 

올리고자 할 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2) 우리의 죄책을 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방편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 핑계를 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 된 상태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능력의 결핍 때문이 아니고 게으름과 의지의

 

결핍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죄에 얽매여 있는 것을 좋아하며

 

우리 자신을 폐쇄시킨다. 그래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

 

(행 13:46) 하는가 하면,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형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3)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희망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결코 희망을 걸 수가 없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믿으리요? (롬 10:14)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한다면 이런 식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일 등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편들이다. 은혜가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여 우리가 이 방편들을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

 

 

 

(4)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할 때 구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게서 이 방편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주실 수가 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통상적 관행이다. 보편적인 희망을

 

시험해보는 것은 유익하다. ‘주께 기도하라. 혹시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아주 불확실할지라도 기도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그가 만나 주시는 통상적인 방법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토마스 맨톤의 이 글은 교회 안에 거듭나는 사람이

 

왜 적은지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주권에 무릎 꿇고 주님께 순종하려는 자가 적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되 주일 낮 예배나 참석하고,

 

설교 시간에 투덜거리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거나 무릎 꿇어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듭남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설교를 열심히 경청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자기의 죄를 아는 대로 자백하고,

 

개선하려고 힘쓰며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자들을

 

만나주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혹은

 

“세례 요한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동적이 되지 말고 능동적이 되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며 천국을 얻을 때까지 계속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침노해 들아가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저 거듭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십시오.

 

이제는 은혜의 모든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천국을 향하여 공세를 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며

 

천국을 침노하여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훗날 천국에서 함께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