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1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3 금보다 귀한 믿음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8. 01:28





3 금보다 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후서 1:1-2)



오래전 저는 네비게이토출판사에서 나온 찰스 프라이스가 지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책은 적극 권할만한 가치가 있는 아주 탁월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 찰스 프라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용어 중에 가장 오해가 많은 몇 개만 열거하라고 


한다면, 나는 제일 먼저 믿음을 들겠습니다."



저는 그 대목을 읽을 때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고 있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들에게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충고를 주어야 한다. 여기서도 역시 


죄인들에게 믿음을 설명해 주어야만 하며 무엇이 믿음이며 또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를 알려 주어야 한다. 죄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복음을 믿습니다.' 사실은 그가 지금까지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끔 교육을 받아 왔을 뿐, 그가 그 복음을 믿지 않으며, 


믿음에 대한 증거를 전혀 알지 못하며 결국 그의 믿음은 증거가 따르지 않는 


인정에 불과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다는 생각에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자기들이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여러분, 피니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아마 아직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을 다 읽고 나면 이해할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들입니다. 


성경은, 믿었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꼐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31-44)



여기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네가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행 8:12-21)



시몬도 분명히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도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4-26)



이와 같이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어도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세 곳 모두에 믿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 곳 모두 믿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이들처럼 거짓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참 믿음에 관하여 말씀드리길 원합니다.





1.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을까요?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1) 맏음은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3:11-12).


찰스 하지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믿음이란, 증거가 제시될 때에 그 증거의 


사실성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증거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고 증거하셨습니다.


또한 대속의 죽음과 믿음에 의한 구원과 거듭남의 필요에 대해 증거하셨고,


천국과 지옥의 실존과 재림과 심판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아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실패의 죽음이 아니라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거듭남의 필요성, 


천국과 지옥의 실존,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선 이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기는 하나,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존 웨슬리는 "마귀가 교회에 믿음 대신에 정말 믿음 같아 보이고, 


믿음같이 들려서 극소수의 사람만이 구별해 낼 수 있는 대용품을 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대용품이 바로 '복음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 찰스 피니는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능력]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예전에 한 신학 교수로부터, 믿음은 '지적 활동이나 지적인 상태


혹은 확신을 가진 상태'를 뜻하는 단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늘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듣곤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들을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믿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피니는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참 믿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이러한 상태에 머물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2) 맏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요 1:12).



게리 콜린스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설교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은 기꺼이 우리의 죄 된 행동들을 버리고


자신을 그리스도의 주권에 굴복시키는 것임을 일러 주는 데는 실패했다."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믿음을 심어 주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참 믿음을 심어 주는 데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믿음은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처럼 믿음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분으로 모셔 들이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만 모셔 들이면 구원을 받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이 진리가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는지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예수님이 왕이심을 의미함)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무엇으로? 단순히 구주로가 아니라 왕으로)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1-12)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구주가 아니다)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단순히 구주로 영접하지 말고


임금(주)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 진리는 저나 몇몇 사람이 외로이 전하고 있는 불확실한 진리가 아닙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았고 강력하게 증거했습니다.



먼저,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주와 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는 결코 주님을 


단순히 자기를 위하여 속죄하는 제사장으로만 영접하는 자가 아니다."



또, 리차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이 두 관계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의 고난을 인정하고 용서와 영광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림과 구원 방법에 순복하는 


것이다."



또,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대답해 보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확신한다면, 모든 사람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표어는 '황제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든지'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황제나 


왕이나 군주가 아니시라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이다."



또, 에이든 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권 없는 구주는 없다. 그리스도는 구주이시며 주님이시다. 죄인이 그를 


주로서 시인하지 않고도 구주로만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현대의 


이단이다... 그리스도의 구주 되신 신분은 그의 주권과 영원히 연합되어 있다."



그리고, 복음주의 신학의 거장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믿음, 실로 믿음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은 그 자체에 복종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롬 10:3). 또한 그 믿음의 대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롬 1:4)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7)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평생에 걸친 순종으로 이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여 복종하지 않고도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예수 그리스도를주님으로 인정하여 복종하지 않으면서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나만 더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명한 성경 교사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가 지은 책 중에


[하나님 나라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아주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구원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선포하고 있기 떄문에


나는 구원의 메세지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선포되는 


구원의 메세지에는 극히 일부의 진리만이 내포되어 있을 뿐. 그 핵심적인 


내용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메세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글쎄요, 나는 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구원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의 왕관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여러분이 쓰고 있는 왕관을 드려야 합니다...


구원은 여러분이 죽어서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의 지배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우리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이 시간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3) 믿음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마 18:2-3).



어린아이는 무력하고 그래서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지합니다.


마치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박사가 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책에 보면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킹 제임스판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은 저들이 번역을 시작하던 3백5십여년 


전에 구약 성경 가운데서 히브리어 단어 하나를 바른 영어로 옳게 번역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결국 저들은 '의지하다'(trust)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의지하라'는 말을 많이 찾아보게 되며 실로 일백 쉰 두번을 


사용하였습니다. 저들이 신약 성경도 번역하게 되었을 때 구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단어를 문제 삼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헬라어로부터 


번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올바른 영어 단어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직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믿는다'(believe)


라는 단어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 때는 구약성경의 단어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믿는다'라는 말로 번역하였으며 특별히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에


'믿는다'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혼동과 오해를 


초래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의지하지 아니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구원의 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주를 믿으라'고 말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번역이 바른 번역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를 의지할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찰스 프라이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그의 탁월한 책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면서 믿음이라는 말이 두 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그 두 가지의 차이를 '스코틀랜드의 네호스의 괴물을 믿는가?'라는 


질문과 '아스피린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예로써 설명했습니다.



네호스의 괴물을 믿느냐고 묻는 것은, 네스호에 목이 길고 등에 


혹이 낙타처럼 둘 있는 괴물이 숨어 살고 있어서 사람들이 탐색하러 


가기만 하면 사라졌다가 가끔 나타나곤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는지를 묻는 겄입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예' 일 수도 있고 '아니오' 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괴물의 존재를 믿거나 혹은 밎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믿음이란 단지 지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아스피린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여러분이 고통을 경감시키는 약인 아스피린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으로 간주하고 묻는 것입니다.


제가 묻는 바는, "여러분에게 두통이 발생할 경우, 아스피린을 복용하여 


그것이 작용하도록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믿음은 단순히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역사하시도록 하는 믿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하기"


(히 11:6) 때문에 첫 번째 종류의 믿음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번째 종류의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토대 위에서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을 가짐으로서


죄의 지배에서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역사하시게 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만이 우리의 영혼을 죄와 지옥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4-6)



우리가 예수님의 가지라는 사실은 가슴이 절일 정도로 소중한 진리입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분리되면 생명을 소유하거나 유지할 수 없습니다.


나무로부터 공급되는 수액과 즙이 가지의 모든 잎과 싹과 꽃과 열매의


근원이며,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입니다. 


나무에서 베어내면 가지는 곧 시들고 죽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지들인 우리들 역시 우리 자체 안에 


생명이나 힘, 또는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은혜와 도움과 능력을 공급 받아서 


현재의 우리가 되며, 우리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우리가 행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절망하고 또 자신은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무엇을 이루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뿌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주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1:19-23)



이처럼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크게 지적 요소, 선택적 요소, 의탁적 요소등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지적 요소복음 진리를 밝히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을 가리키고,


선택적 요소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로 진실한 마음으로 결단하는 것을 가리키며,


의탁적 요소내적 부패를 극복하고 실제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죄에서 자유를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을 


가리킵니다.


이 중 세 번째 요소를 정밀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겸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의 구원을 받고 심령의 가난함을 얻으며


자신을 비우고 겸손히 그분만을 높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로


부터 자라기 위하여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나의 전부로 삼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그분께


대한 겸손하고도 진정한 신뢰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을 비우고 겸손히 그리스도만을 높이며,


겸손하게 그분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의탁의 첫 번째 요소는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가 바로 참 포도나무의 진액성령입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이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이 은혜에 의해서만 죄를 극복할 수 있으며,


주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이 은혜가 임합니다.


그리고 은혜가 그를 변화시킵니다.




② 신뢰



의탁의 첫 번째 요소는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보다 자기의 관계된 것으로 자신에 대한


모든 신뢰를 버리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겸손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영안이 밝아져 하나님이 자기를


보시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타락한 존재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내적 상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식하게 될 때 교만은 깨지고 겸손하게 됩니다.



그러면 겸손해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음 단계로 전진해야 하는데, 다음 단계는 바로


주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6-27)



저는 믿음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이 구절이 생각나곤 합니다.


죄에서의 구원 즉 모든 죄를 끊어 버리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항상 여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를 믿는 자이지 


주님을 믿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내적 부패와 도덕적 무능, 영적 파산을 처절할 정도록 절감하고


'내 힘으로는 안 되는구나, 결심도 노력도 고행도 수양도


다 역부족이구나.'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절규하는 위치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 소망이 있습니다.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이라는 책에서 주님은 릭 조이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스스로의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네가


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빈자리에다


나에 대한 신뢰로 채우지 않으면 그것은 오직 불안으로 이어질 뿐이다."



또, 폴로라 슬로슨 웰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는 노력만큼


슬프도록 헛된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생명샘에 매일매일 의지하지 않은 채


사랑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려고 시도해 보라. 당신은 곧 가물어 


버릴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샘을 보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부정에서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의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이 단계는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단계입니다.




③ 기도


믿음의 마지막 요소요, 결정적인 요소인 의탁은 겸손에서 줄발합니다.


겸손에서 출발한 그것은 신뢰의 단계를 거쳐 결국에는 


기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절규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때 죄의 결박은 끊어지고 영혼은 자유를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은 단순히 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진리임을 마음으로 확신하는 사변적인 믿음, 즉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3대 요소인 지적 요소, 선택적 요소, 그리고 의탁적 요소를 


모두 갖춘 참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의탁에 있어 겸손, 신뢰,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바로 '호산나 기도' 입니다.


즉 구원을 갈구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24-28,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마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했듯이 자신의 도덕적 무능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깨달았으면 이제는 주님께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죄의


결박에서 자유케 해 주소서.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 기도를 합니까?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주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한 것처럼 


주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믿음''인내'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구원(죄 사함 + 죄의 지배에서의 자유)을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요 8:34-36).





2. 믿음의 역할



여러분은 믿음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역할을 죄사함을 가져다 주는 것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관한 불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지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고,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새 삶을 위해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할은 믿음에 관한 불완전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까요?




(1) 믿음은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행 15:9)



참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5-16)



일찍이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믿음의 '즉각적이고도'(그러므로 믿음이 아직 어려서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라-저자) 항상 있어야 하는


열매는 힘이다. 곧 죄를 이기는 힘이다. 첫째로는 모든 외적인 죄를 이기는


힘인데, 모든 악한 말과 행실을 이기는 힘이다. 다음으로는 내적인 죄를


이기는 힘이다. 믿음은 모든 불경건한 정욕과 성정으로부터 마음을 정결케


하기 때문이다."




(2) 믿음은 사람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행 26:18)


이와 같이 믿음은 의롭다 함을 얻게 할 뿐 아니라 거룩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이십니다


(고전 1:30).


그러므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의로다 함을 얻게 될 뿐 아니라


거룩해집니다.


그런 의도에서 찰스 피니가 [성결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결에 거하기 위해서는 믿음 밖에 없다는 대답 이외의


모든 대답은 율법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이라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수고하며 애써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성결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의롭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성결케 되는 것도 믿음으로만 된다."




(3) 믿음은 하나님께 순종하게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



바울은 자기가 왜 복음을 전하는지 복음 전도의 목적을 밝혔습니다.


첫째,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즉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그것은 단지 믿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믿고" "순종케" 한다고 말하지 않고 "믿어"(원인) "순종(결과)케"


한다고 말한 것에 주의하십시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과율에 의해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을 분리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미혹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함 있는 산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 "믿음에 순종을 더해야


참 믿음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그 안에 순종의 원리 혹은 뿌리가 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반드시 순종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순종이 나타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할 중의 하나는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4)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약 시대 때는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았는데


지금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하는


설교자나 성도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율법을 대신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믿음은 율법의 대용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3장 31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패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현대어 성경에는 이 구절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을까요? 그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만큼 더욱 참 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율법의 도덕법, 의식법, 민법 중 도덕법을 의미)을


굳게 세운다는 것은 굳게 지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율법을 굳게 세웁니까? 


바로 '믿음' 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율법 준수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오히려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율법을 지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5)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어는 누구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이 불신앙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이 아니라 믿음이 없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요한복음 15장 4-5절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것은 전절인 5절 말씀을 문맥에 주시하며 읽어 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앉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여기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표식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에녹의 삶을 지켜보고 


에녹은 정말로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자라고 인정하고 증거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음이 곧 주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능과 역할입니다.


믿음은 에녹처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결과 에녹처럼 들림(휴거) 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6)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믿는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이 말씀의 첫 머리에 보면 "이 세상에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15)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우리가 사랑해서는 안 될 대상'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우리가 사랑해서는 안 될 대상으로


'자기'와 '돈'과 '쾌락' 세 가지를 뽑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이기심, 탐심, 그리고 정욕을 뜻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 보면 세상의 의미가 좀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16)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 이것이 바로 세상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긴다는 말의 의미는 명백합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 생의 자랑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해 올 때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쳐서 쓰러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믿음의 역할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만이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계 21:7).




3. 믿음의 시금석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닌지 냉정하게 


시험하고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평생 교회 다니고 지옥 가는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믿음의 진위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다음 네 가지입니다.


이 네가지 시금석을 통해 단계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1) 확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아무리 믿으려 해도 안 믿어진다."


호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신자가 아닙니다.




(2) 행함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경계하시면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버림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마 7:23).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인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버림 받게 되는 이유도 한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적인 순종 즉 행함을 통해 


자기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3) 사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6)



토마스 맨톤은 '믿음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반납'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조나단 에드워드는 "구원하는 믿음은 빛과 함께 열도 가지고 있다.


사변적인 믿음은 빛은 가지고 있으나 열이 없다. 그것은 마귀의 믿음이며


사랑이 있는 믿음과는 다르다... 사랑은 믿음의 생명이요, 영혼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다. 사랑은 살아 있는


믿음과 다른 모든 믿음을 구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가는 곳에는 그림자가 따라다닙니다. 


반드시 그림자가 따라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붙습니다



그러면 이 행함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사랑에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가 


아닌가를 살펴야합니다.




(4) 겸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여기서 교만과 믿음이 서로 대조되고 있음이 보이시지요?


그렇습니다. 교만과 믿음은 서로 대조적입니다.


불신앙의 저변에는 교만이 있고, 


믿음의 저변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며칠 전 새벽기도 설교를 하는데, 성령께서 3절에 대하여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 줄 아느냐? 그것은 말씀을 지식으로 받지 않고


계시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해져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첫째, 누구든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둘째,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것은 겸손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4절에 나타난 대로 어린아이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셋째, 겸손한 자에게만 말씀이 지식이 아닌 계시로 임합니다.


즉, 어린아이 같은 자에게만 천국의 비밀이 숨겨지지 않고 알려집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여기서 "나타낸다"는 것은 계시를 뜻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입니다(요 17:3).


예수님은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아버지를 알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마 11:27).


그런데 겸손한 자만이 이와 같은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자에게만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계시로 그의 심령에 와 닿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은 후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롬 10:17)고 했는데, 여기서 말씀은 레마 즉 계시적인 말씀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이해하는 것은 머리의 작용이요, 깨닫는 것은 영(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계시가 임해야만 말씀이 깨달아 집니다.


죄를 깨닫는 것도 계시가 없으면 안 되고, 복음을 깨닫는 것도 


계시가 없으면 안 됩니다. 


계시가 없으면 회개도 없고 믿음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계시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 즉 마음이 겸손한 사람에게만 임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만이 참 믿음을 소유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이 믿음의 시금석 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겸손합니다.


캐더린 쿨만은 "신앙은 신념, 확신 및 신뢰보다 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앙은 자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찰스 하지는 "겸손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겸손 없이는 참된 신앙, 하나님과의 교제,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능력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설교를 해 오면서 관찰을 통해서 알게된 것인데,


어떤 사람은 착하고 겸손합니다.


이런 사람은 옥토 밭으로 복음을 들으면 즉각 구원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악하나 겸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창기나 세리와 같은 사람으로 앞의 경우만


못하지만 구원받는 데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착한데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교만이 깨져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악하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거의 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희망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십중팔구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이런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날 성령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참 믿음 안에는 겸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음은 갖고 있는데


겸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겸손이 없다. 이런 사람은 명목상의 신자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어떤 사람은 믿음은 갖고 있으나 겸손이


있어야할 자리에 교만이 대신 자리잡고 있다. 이런 사람은 외식하는 자들로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될 것이다. 그들은 지옥에 던져질 뿐 아니라 갑절의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 이 얼마나 두려운 말입니까?


혈관 속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믿음 안에는 겸손이 흐릅니다.


그리고 피가 생명인 것처럼 믿음 속에 흐르는 겸손이 곧 믿음의 생명입니다.


혈관이 다 같은 것이 아니고 대동맥이 있습니다.


대동맥 속에는 더 많은 양의 피가 흐릅니다.


마찬가지로 남보다 더 겸손하고 그래서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 이름이 큰믿음교회인데, 큰믿음이란 단순히 확신이 강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칭찬받은 가나안 여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인은 '개'라는 말을 들어도 반발하지 않을 정도로 겸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중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칭찬을 받은 백부장 역시


점령군의 장교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깊은 겸손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확신의 크기가 아니라 겸손의 크기에 정비례하며,


따라서 믿음의 크기를 잴 때는 반드시 겸손을 재어 보아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믿음에 대하여 총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한 눈에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을 


하나 그려 보도록 합시다.


여러분의 머리에 확실히 입력이 되도록 여러분 각자가 종이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작은 원을 하나 그리십시오. 그리고 그 원보다 큰 원을 6개,


도합 7개의 원을 과녁 모양으로 그리십시오.


그리고 각각의 원에다 간단한 설명과 성경 구절들을 써 넣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작은 원 즉 가장 중심부에 있는 원에는, 


'말씀(계시, 롬 10:17)' 이라고 써 놓으십시오.


두번째 원에는, '겸손(합 2:4)' 이라고 써 넣으십시오.


세 번째 원에는, '예수님을 의지함(요 15:4-5)' 이라고 써 넣으십시오.


네 번째 원에는, '기도(주의 이름을 부름, 행 2:21)' 라고 써 넣으십시오.


다섯 번째 원에는, '사랑(은혜, 갈 5:6)' 이라고 써 넣으십시오.


여섯 번째 원에는, '행함(약 2:14)' 이라고 써 넣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원에는, '복음 지식과 확신' 이라고 써 넣으십시오.




이 일곱 요소는 믿음의 껍데기를 형성하는 부분입니다.


그 내부에 있는 것들이 실제로 믿음의 내용물이요, 알맹이입니다.


그러므로 1-6까지의 것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알곡입니다.


그리고 7번만 가지고 있는 자는 쭉정이 입니다.


이제 이 그림을 가지고 참 믿음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1) 믿음은 말씀, 로고스가 아니고 계시적인 말씀인 

레마를 들음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레마)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레마는 계시적인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계시가 필요합니다.




(2) 말씀이 지식으로 임하면 사람이 교만해지지만

말씀이 계시로 임하면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즉

계시적인 빛 속에서 정직하게 자기와 대면하게 되고

자기의 죄책뿐 아니라 죄성(내적 부패)을 보게 되어

마음이 낮아지게 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3) 겸손은 자기를 부정하고 온전히 예수님을 자기의

의로움 거룩함의 근원으로 의지하게 만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4) 겸손과 주를 의지하는 마음은 기도로 표출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5)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께로부터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믿음뿐이니라."(갈 5:6)



이 사랑을 우리는 은혜 혹은 성령(예수님이 진액)이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도 있습니다.




(6) 이상의 단계들을 거치면 그 은혜로 말미암아 비로서

우리는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여러분 이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 생성되고 역사하게 되는 과정이고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그림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참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나누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문제가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한때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은 멸망 받는 많은 사람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어떤 사람은 믿다가 뒤로 물러가 더 이상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도 


여전히 멸망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바울은 최후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신자들을 


본받아 최후의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결코 믿었다고 다된 것이 아닙니다.


뒤로 물러가지 말고 계속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믿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이처럼 바울은 믿음에 거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 1:21-23)



계속 믿음에 거하는 자는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



믿음에 거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들에 대한 말씀이지만 그 원리는 모든 남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게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여기서 바울은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질문은 우리가 계속 믿음에 거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가 계속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내가 믿음이 있었더라도 지금 내게 믿음이 없다면


즉 내가 믿음에 거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버리운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뒤로 물러서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