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1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7 오직 믿음의 올바른 적용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8. 01:10

 

 

 

 

7 오직 믿음의 올바른 적용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6-17)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무명의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통해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 책은 구원론을 재조명하고 성경대로 돌려놓으려는

 

저의 작은 노력입니다.

 

 

현재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진리에 눈을 뜨고

 

회개하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동안 잘못 가르침 받은 것이 쌓인 결과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대구에 있는 교회의 수련회 때

 

주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양약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첫째, 구원의 공로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100%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보혈은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구원의 공로는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렇다고 전 인류가 천국에 갑니까? 아닙니다.

 

회개하고 믿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공로적인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지만

 

그 구원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원의 수단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도 그 공로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구원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막 1:15).

 

 

 

 

셋째, 이것이 중요한데 우리의 회개와 믿음이 참된 것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공로를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위조지폐는 가치가 없는 것처럼 

 

가짜 회개와 믿음 역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회개이고 믿음입니까?

 

 

가짜 회개는 죄를 자백만 하는 것이요,

 

진정한 회개는 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겔 18:30-32).

 

가짜 믿음은 기독교의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요,

 

진짜 믿음은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고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약 2:14).

 

그러므로 저는 이런 회개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교 때마다 강조하고 주장합니다.

 

 

저는 일부 사람들이 저의 설교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처럼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만으로 충분하나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상 세 가지를 여러분이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저의 가르침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지극히 성경적인 메시지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최근의 일입니다.

 

금요기도회를 인도하는데 성령께서 제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은 오직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회개나

 

복음적인 순종 또는 거듭남의 증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저는 이 음성을 들은 후 과연 그러한가? 하고

 

성경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여기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역입니다.

 

이 말씀은 하박국에서 바울이 인용한 말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그러므로 ‘오직’이라는 단어는 로마서에서 덧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단지 번역 과정에서 우리말 성경이 ‘오직’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세계 어느 성경에도 ‘오직 믿음으로’라고 번역한 곳은 없습니다.

 

믿음을 그렇게 강조한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도

 

‘오직 믿음으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순히 ‘믿음으로’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우리 성경에만 ‘오직 믿음으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

 

 

그러므로 오직 믿음에 관한 성경 구절 중 이것은 제외하고

 

그 외에 성경에 나오는 오직 믿음의 모든 사례들을 추적하여

 

함께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그러면 오직 믿음이 율법의 행위를 상대로 사용되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롬 4:13)

 

 

여기서도 오직 믿음은 율법의 행위(율법)를 상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여기서도 오직 믿음이 율법이나 율법의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오직 믿음의 전부입니다.

 

의외로 많지 않지요!

 

이처럼 성경에서 오직 믿음은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에

 

반하는 단어로만 사용이 되었습니다.

 

결코 회개나 복음적인 순종이나 의나 사랑에 반하여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성경에는 회개, 복음적인 순종(행함),

 

거듭남의 징표인 사랑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을 아무데나 들이대고

 

지극히 성경적인 회개, 복음적인 순종, 거듭남의 증표에 대해

 

대적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바른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후자지요.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반응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오직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회개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진해에서 저의 책을 읽은 한 가족이 교회 문제를 놓고

 

한 달간 기도한 끝에 마음에 결정을 내리고

 

저희 교회에 등록한 일이 있습니다.

 

그 가정에 침례신학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 형제가 하루는 전에 신앙 지도를 받은 목사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성경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절들을

 

일일이 찾아서 보여 주며 “보아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므로

 

회개해야만 구원받는다고 하면 이단이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워하며 저에게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목사가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단’이라는 발언을 할 수 있는가?”

 

마치 영적인 미개인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짙은 어두움이 이렇게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참으로 침통한 마음조차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조차 싫었습니다.

 

정말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설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설명한 것을 여러분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회개는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요건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이처럼 예수님은 단지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21)

 

 

예수님뿐 아니라 바울 역시 전도여행을 하며

 

단지 믿음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에 나오는 대로

 

회개와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요약한 것입니다.

 

즉 조직신학과 같은 성격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회개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믿음(신앙)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확립되어 있었던 명백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들 구절이 오직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모두 회개와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회개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오직 믿음, 오직 믿음”하며 

 

죄를 회개치 않는다면 지옥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회개치 아니하므로 지옥에 간 것처럼

 

결국 지옥에 가서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회개에 관하여 아직도 할 말이 많습니다.

 

에스겔 18장 30-32절에 보면 회개에 대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 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죽을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어다.”

 

 

이처럼 에스겔은 회개치 않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음은 영원한 멸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은 회개를 가리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다리와도 같습니다.

 

 

누구든 회개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 8-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 회개치 않은 자들은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여러분에게 구원의 날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회개는 이토록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회개를 외쳤습니다.

 

노아를 위시해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자기 시대에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메신저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신약 시대에도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개를 외쳤습니다.

 

과연 그런가 확인해 볼까요?

 

 

먼저,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또, 우리 주 예수님이 회개를 외치셨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회개를 외쳤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막 6:12)

 

 

이것은 오순절이 되어 교회 시대가 시작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아래에 소개하는 성구들은 모두 오순절 이후에

 

회개를 촉구한 말씀들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행 17:30-31)

 

 

마지막 구절에서 “이제는”은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회개가 신약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눅 24:47-48)

 

 

여기서 예수님은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는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쯤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하나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즉 사역의 목적

 

분명하게 이해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고

 

거기에 사역의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성공적인 사역을 한 지역들에서도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읍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0-23)

 

 

이처럼 예수님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가장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고 가장 많은 추종자들이 일어나게 된 고을들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만족하지 않으셨던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이런 일을 행했다면 어떻게 느꼈을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크게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슬프게도 저는 이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님처럼 사람을

 

회개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단지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

 

혹은 은혜를 끼치기 위하여 설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도들이 많은 것을 배우고 설교에 은혜를 받아도

 

회개치 않으면 멸망합니다.

 

그런데도 설교자들은 설교를 통해 성경을 가르치고 은혜를 끼쳐

 

자기의 추종자들(교인)을 얻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고

 

성도들을 회개시키는 설교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상을 말하자면 성도들이 교회에서 떠날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한 나머지

 

설교를 통해 회개의 나팔을 거의 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짖지 못하는 개들인 ‘몰각한 목자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관행처럼 되어 오면서

 

이제는 정상인 것처럼 되어 버렸고,

 

바울처럼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기로 

 

결단하고 과감하게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면 도리어 그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갈 1:10).

 

 

하지만 그것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날이 심히 가까웠고 그날에는 회개함으로써 

 

죄를 끊어버리지 않고 무엇이든 습관적인 죄에 매여 있는 자는

 

그가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모두 지옥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회개합시다.

 

 

 

 

2. 오직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순종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와 복음적인 순종을 서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1절이나 야고보서 2장 14절을 근거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말하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인데

 

왜 행위를 주장하느냐?”라는 답답한 말들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복음적인 순종’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 율법의 행위는 대적하나 복음적인 순종은

 

결코 대적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기독교 중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빈번한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복음적 순종이 칭의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빈번한 주장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행위(율법의 행위)와 행함(복음적인 순종)은 문자적으로는 같은 뜻 같지만

 

그 의미는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바울이 비판적으로 사용한 ‘행위’라는 단어는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 즉 ‘율법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롬 3:20)

 

반면에,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의 행함’입니다.

 

이 둘이 어떻게 다른 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행위는 구원받기 전에 나타나는 것이고

 

행함은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납니다.

 

 

둘째, 행위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으나

 

행함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셋째, 행위는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있으나

 

행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됩니다.

 

 

이와 같이 ‘행위’‘행함’은 단어는 같으나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로마서와 야고보서 사이에

 

충돌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행함 있는 산 믿음을 주장하는 설교나 글에 대하여

 

율법의 행위를 운운하는 반박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믿음은 절대로

 

복음적인 순종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기 ‘믿음’‘행함’이 함께 나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오직 믿음을 운운하며 구원하는 믿음에서

 

복음적인 순종을 배제시켰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복음적인 순종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적인 순종에 대해서 오직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음에서 복음적인 순종을 배제하면 그 믿음은

 

이미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고

 

그런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하나밖에 없는 줄 아는데 아닙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머리로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말씀이 머리로 들어가면 이해하고 확신하는 혼적인 믿음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혼적인 믿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인 줄 알고

 

이런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을 줄로 압니다.

 

혼적인 믿음도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믿음이기에

 

믿음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2) 영으로(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말씀이 머리로 들어가면 혼적인 믿음 즉 머리로 믿는 믿음이 되고,

 

영으로 들어가면 영적인 믿음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됩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장 9-20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서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혼적인 믿음은 단지 지식과 확신으로 구성됩니다.

 

이것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모든 말과 행동을

 

생성시키는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마음으로 믿게 되면 반드시 삶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말한 행함 즉 복음적인 순종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행히도 교회 안에 머리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마음으로 믿지 않고 머리로 믿는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설교자들에게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로고스와 레마가 그것입니다.

 

로고스는 듣는 자들에게 혼적인 믿음을 주고,

 

레마는 듣는 자들에게 영적인 믿음을 줍니다.

 

로고스는 사람의 머리에 이르고 영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혼적인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레마는 성령의 조명과 기름부음이 융합된 설교로

 

그 말씀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영에까지 들어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창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14:12-13)

 

 

이처럼 레마는 찌르는 검이 되어 혼은 물론 심령 깊숙이 파고들어 갑니다.

 

그래서 영적인 믿음을 창출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원어에 보면 레마)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설교자들이 성령의 조명과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존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식과 화술 그리고 유머에 의지한 영적으로 메마른

 

설교를 합니다.

 

책에서 베끼고 머리에서 짜내서 하는 지적 설교가 너무 많고

 

그래서 교회 안에 마음으오 믿는 자가 적은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청중들에게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을 가지려면 말씀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 들을 귀가 열린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들을 귀는 겸손과 순종의 의지가 있을 때 활짝 열립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식으로 인해 교만합니다.

 

그리고 순종하려는 의지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병인 죄의 병을 심상히 고쳐 주고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는 소경된 인도자들의

 

가르침에 귀가 더 솔깃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회개하고 순종할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귀가 열려서 마음으로 믿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오직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거듭남의 증거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이후 많은 설교자들이 칭의에 집중하고

 

중생을 소홀히 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물론 이신득의는 굉장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을 뿐 아니라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 중 자주 언급하는 것입니다만,

 

죄는 두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죄책과 내적 부패입니다.

 

예수님은 불완전한 구세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자로서 이 두 가지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책을 해결하고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내적 부패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즉 칭의로 죄책을 해결하고 거듭남으로 내적 부패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진리는 히브리서 8장에 나오는 새 언약에 잘 나타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를 불러 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

 

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히 8:8-12)

 

 

이처럼 새 언약은 단순히 피로 세운 언약이 아닙니다.

 

새 언약에서 주님은 우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우리 죄를 다시

 

기억치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우리 생각에 두고

 

우리 마음에 기록하십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3장에 잘 나타나듯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을 뿐 아니라 반드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자는 그의 삶이 이전과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자에게는 그가 거듭났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변화가 그의 삶에 나타납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7-10)

 

 

이와 같이 사람이 거듭나면 의를 행하는 것과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의를 행치 않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진짜 거듭난 자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오직 믿음은 회개나 복음적인 순종에

 

대한 것이 아니듯 거듭남의 증표인 의와 사랑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은 결코 이런 것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시금석으로 삼아 

 

자기가 진짜 거듭난 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실 때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회개했는지, 또 주님께 순종하는지,

 

그리고 거듭난 자로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지를 보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고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후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 아니고

 

하나님의 엄위의 나타나심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의를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욥 34:10-12)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시 9:7-8)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0-31)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의 원리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겠느냐?

 

부모가 자식을 버리겠느냐?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이런 말장난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런 말장난으로 진리를 흐리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심판을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 전에 반드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 89:1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심판 전에 반드시 인자하심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앞서 언제나 긍휼을 베푸시는데,

 

하나님의 긍휼은 시간을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릭 조이너의 책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자비를 구했으니 자비를 입을 것이다. 네게 시간을 주겠다.

 

시간이 네게 대한 나의 자비이니라. 곧 시간이 다할 것이니 이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여라. 조금 있으면 내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심판을 늦추는 하루하루가 자비니라.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시간을

 

지혜롭게 써라.”

 

 

이처럼 하나님의 자비는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절대로 죄를 고집하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무조건 용서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습관적인 죄에 빠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비성경적인 기대를 이제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끊어 버리고 주께 복종해야 합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