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소망 ♡ 글

하나님은 그분의 임재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에 깊이 감동하셨다!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7. 1. 17:20





하나님은 그분의 임재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에 깊이 감동하셨다!




어쨌든 다윗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사로잡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다윗의 열정이다. 나는 그 열정이 사람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그 찌르듯이 더운 여름날

루애지애나 주 웨스트 먼로에서 나는 하늘로부터 이런 힌트를 얻었다.


"네가 세우면 내가 오겠다"(If you build it, I will come).


다윗은 성경 상에서 독특한 표현으로 설명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2, 참고 삼상 13:14).


"내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혹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닮은" 사람이었다.


또 한편 다윗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좇는

사람이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이런 두 번째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친밀한 영적 동행이다.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다윗의 장막과 솔로몬의 성전 그리고 

모세의 장막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모세의 장막과 솔로몬

성전은 세 군데의 구분된 장소, 즉 바깥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갖고

있다. 거대한 휘장,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무겁고 두꺼운 커튼이

성막을 가로질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있었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다.


언약궤는 원래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식양(式樣)을 지시받아

만든 것으로 금으로 씌운 나무 상자였다. 궤 덮개 위에는 금으로

만든 스랍(천사) 모양 둘이 날개를 펴고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

고정되어 있었다. 스랍 사이에 있는 공간을 "시은좌(은혜의 보좌)"

라고 불렀으며 이곳이 바로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의 파란 불꽃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또한 현현의 영광(shekinah glory)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언약궤와

은혜의 보좌,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파란 불꽃은 항상 두꺼운 

휘장 뒤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휘장을 좋아하신 것이 아니다. 휘장이 필요

하셨지만 좋아하지는 않으셨다. 에수님이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에 있는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으셨다. 하나님은 휘장을 찢으시되 복구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찢으셨다. 하나님이 휘장을 싫어하신 것은 마치 죄수가 창살을

혐오하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휘장은 그분과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장벽이요 구분선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날까지 하나님이 휘장 뒤에 숨으신 것은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올 때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나의 자녀들과 '분리' 되는 데 질렸다!


아마도 다윗 시대 이전까지 결여되었던 부분은 은총의 열쇠였을

것이다. 모든 성소들 중에서 다윗의 장막에만 휘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열쇠로 오랜 세월 동안 감춰졌던 최고의 지혜의 문

하나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우리와 분리되기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분을 단절시키고 가리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것도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갈보리 산 위에서 독생자의 육체를 "휘장"처럼 찢으시기

까지 했다. 동시에 그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온산에 있는 성전의

휘장 또한 찢으셨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는 이런 휘장이 다시 세워지길 원치 않는다! 

나는 나의 자녀들과 분리되는 데 질렸다." 


하나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엡 2:14).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다른 성소들보다도 다윗의 집을 선호하셨는지

몇 가지 단서를 얻게 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식양대로 장막을 세우고 장막 주변에 나무로

만든 기둥들을 세우고 4.5미터 높이의 천으로 둘러쌌다. 반면에

다윗이 만든 임시 장막 주변에는 아무런 장벽도 휘장도 없었다.


다윗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파란 불꽃으로부터 사람들들을 분리

시키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다윗의 장막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둘러싸고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예배자들이었다.

거의 36년 동안 일년 365일 일주일 7일 하루 24시간 매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다윗 왕은 불면증에 시달려 한 밤중에라도 일어나면 

언제나 성막으로부터 들려오는 암송과 찬양과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윗 왕은 숙소 쪽에서 정면으로 대하고 있는 언덕을 향해 서면

언약궤 주변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발이 촛불에 비춰져 생기는 

그림자들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때 다윗은 다음과 같은 시를 쓴 것 같다.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해 너의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2)


낮과 밤으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서 춤추고

경배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들고 있는 손으로 열린 하늘을

붙잡고 있듯이 말이다. 다윗이 너무나 힘들어 보이는 때면

천사가 바로 옆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다윗은 예배자들을 편 팔고 춤추는 발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파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다윗의 장막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다윗의 장막은 독특했다. 언약궤가 보관되었던 다른 성소들에서는

예배자들이 휘장 뒤에 가려 있는 것을 예배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었다. 단지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번 휘장 뒤로 들어가는 일을 감행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의 장막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예배자이든지 여행자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다 볼 수 있었다.

휘장이 걷힌 예배는 아무 방해가 없는 임재 체험을 가능케 했다!


다윗의 장막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으로 만든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다윗을 열망 때문이었다. 다윗은 말했다.

"어떻게 여호와의 언약궤를 내게로 가져 올 수 있을까?"(삼하 6:9).

그는 이 한 가지 열심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다.


그러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재앙으로

끝났다. 다윗은 "거룩한 운반 작업"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했다. 마침내 다윗이 레위인들과 예배자

들과 함께 25km나 되는 먼 길을 도보로 이동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드디어 해냈다!"는 환희와 안도감 때문에 춤추며

기뻐했던 것 같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궤를 옮기는 순례 여정 어디쯤에선가

다윗은 하나님이 가치 있게 생각하시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기 

시작했다. 반면 그의 아내 미갈은 하나님의 신성보다 사람의 

명성에 가치를 두었다. 그래서 태의 열매를 갖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 물론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다윗과의 관계가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로 사람의 무대 위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만나는 것이 어색할

때가 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친밀한 예배에 등을 돌린 열매 없는

교회들로 가득하다. 이 교회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보다

사람의 명성에 가치를 둔 현대판 미갈이다.


다윗이 좇는 것은 금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는 많은 양의

금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윗이 좇는 것은 궤 자체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다른 궤들을 만들 수도 있었다. 다윗의 관심은 궤 안에

있는 유물들도 아니었다. 그 유물들은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들에게 남긴 꿈같은 기억들이었다.


다윗은 그런 것에 매료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의

파란 불꽃을 찾고 있었다. 다윗의 삶은 마치 "어떻게 하면 그 파란

불꽃을 운반할 수 있을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멋진 건물을 짓고 큰 규모의 성가대를 세우고

더 아름다운 음식을 만들고 더 웅장한 설교를 할 수 있다. 이전보다

더 탁월하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파란 불꽃"

운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불꽃이 없는" 교회들이 사람에게 외면당하듯 그분께도

외면당할 것임을 그분은 알고 계신다. "불꽃"이 없다는 것은

불이 없다는 것이요. 결국 열매 없는 건물과 속빈 마음들 뿐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외쳐야 한다. 


"여기 안에는 추워요. 그래서 모두가 떠나는 

겁니다. 다시금 예배의 불을 지핍시다!"






- 토미 테니 목사님의 [다윗의 장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