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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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와 함께 일하는 믿음!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10. 26. 22:10




행위와 함께 일하는 믿음



지금까지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의 의도가 도덕적

행위를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살펴 

보았다.


사실 바울이 믿음과 도덕적 행위에 관해 말하는

방식을 보면 실제 사정은 이와 정반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메세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며, 이 응답이

우리의 전인격을 포괄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우리의 몸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차원 역시

포함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행위 없는 삶이 어불성설이라면, 행위와 분리된

믿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라면, 행위 없는 믿음

역시 죽은 것이라'(2:20)는 야고보의 말은 하나의

신학적 견해 이전에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불가피한 조건을 기술하는 것에 오히려 

가까울 것이다.


믿음과 도덕적 행위의 관계를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서신 중 하나가 데살로니가전서다.


앞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의 자태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세 개념

으로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믿음의 역사'

라는 표현이다.


'역사' (役事)라고 번역된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행위'로 번역되는 바로 그 단어이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구원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 혹은 행위로써가 아니라고 할 때

사용한 바로 그 단어이다. 


여기서 이 단어를 행위라고 번역하는 대신 역사

라는 말을 상용한 것은 이 단어가 믿음과 더불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교리적 고려인 

것처럼 보인다.


'행위 아니라 믿음'이라는 이분법이 바울 복음의

요체로 통하는 마당에 '믿음의 행위'라고 번역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편법은 바울이 믿음과 행위라는

두 개념을 하나로 엮고 있다는 사실을 숨김으로써

오히려 더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교리적 전통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다 바울의 거침없는 복음을 잘라 맞추려는,

그럼으로써 복음의 생명력을 거세해 버리는 자살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행위와

하나님의 개념으로 엮어놓고 있다.


믿음의 행위라는 표현은 행위라는 개념을 

'믿음의'라는 수식어가 꾸며주는 구문으로 주된

강조는 당연 '행위'에 놓인다.


행위는  행위인데, 그것이 '믿음의' 행위라는 것이다.

'믿음의'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믿음에서 연유하는' 혹은 '믿음에 근거를 둔' 

행위라고 풀 수도 있고,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행위'

라고 풀 수도 있다.


혹은 행위가 바로 믿음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건 그건 별로 중요

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석하건 믿음과 행위가

하나의 덩어리로 엮어진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믿음은 행위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바울이

(혹은 디모데가) 실제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의 자태다.


바울은 이 행위를 그들의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물론 이 '행위'는 그들의 삶을 요약하는 또 다른 

표현들인 사랑의 '수고'나 소망의 '인내'와 구별

되지 않는다. 


실제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을 단순히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1:8; 3:5,7,10) '믿음과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6,12) 성도들의 

자태를 전쟁에 대비한 무장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도

'믿음과 사랑'은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 가슴을

보호하는 흉배에 견주어진다(살후 1:3)





  권연경 교수님의 [행위없는 구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