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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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면 사건은 종료된다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2. 3. 22:01




회개하면 사건은 종료된다


하지만 구원받은 순간부터 왕 앞에 설 때까지는 이 은혜의 역활이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삶을 위한 은혜도 똑같이 하나님의 호의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힘으로 얻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들어선 뒤에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회심한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율법의 렌즈를 통해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호의와 복을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에 의지한다. 


바울은 답답해서 이렇게 물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

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나중에 바울은 더 매섭게 역설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4)


구약 율법의 규정과 계율과 요구를 지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은혜의 혜택을 잃게 된다!

두려운 일이다. 구원받은 것도 은혜요, 구원의 혜택을 계속 누리는 것도

은혜임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거의 모든 서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썼다. 그가 서신들을 쓴 대상이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잃어버린 영혼들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임을 잊지 말라.


사도 야고보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약 4:6)라고 썼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차원을 달리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라고 썼다. 이것은 더 기쁜 소식이다. 은혜가 우리 삶에 더해지다

못해 배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고 기대

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틀림없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처음 구원받을 때만 아니라 구원이

유지되는 것도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한 뒤로 자기가 엉망으로 

살아서 하나님이 자기의 구원을 거두셨을 거라는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여기 보면 거의 모든 불의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피는 모든 불의를

씻어낸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에서 떼어 놓으려는 모든 것으로

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분은 신실하고 의로우셔서 우리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신다. 신실하다는

말은 매번 그런다는 뜻이고, 의롭다는 말은 그분이 자신의 언약을 항상

지키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내가 다른 사람들의 불의는 용서해도 너는

안 되겠다."고 하시는 법이 없다. 


그래도 확신이 없는가? 당신은 혹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용서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를 다 갖다 써버렸다.'


아니다.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

함이로다"(시 136:1)라고 말한다. 그분의 자비는 고갈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된다. 사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이 시편 136편에만

26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의 용서가 너무 커서 감당이 안 된다면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것을 이해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서 어느 날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구약 율법에 "이는 이로"

(출 21:23-24 참조)라는 규정이 있으므로 베드로 딴에는 일곱 번도 

대단한 아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들이 잘못과 죄와 과오를 그대로

되갚는 현실에 익숙해 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490번이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가 490번으로 제한된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복음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조심하여라. 네 친구가 잘못하는 것을 보거든, 바로 잡아

주어라. 그가 네 지적에 응하거든 용서하여라. 설령 너에게 하루에 일곱번

되풀이해서 잘못하더라도, 그가 일곱 번 '미안하네. 다시는 그러지 않겠네'

하거든 용서하여라"(17:3-4, 메시지).


매일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씩 70일 이상 죄를 지으면 490번이 넘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 짓고

용서받을 수 있는 한도가 490번이라면 예수님은 누가복음에도 "490번까지"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고 

하시고 날 수에는 제한을 두지 않으셨다. 사람이 80년 동안 하루에 일곱

번씩 죄를 지으면 총 204,400번이 된다! 490번을 훨씬 앞지르는 수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용서가 바닥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고갈되지 말아야 할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

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고 명한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다 갖다 쓴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듣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죄를 지었을 때 뉘우치고 회개하면 당신은 용서받는다.

사건 종료다.


이 기쁜 소식과 더불어 중요한 경고가 있다. 이 용서를 악용하여 뻔뻔하게

죄 짓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어떻게 

살아가든 구원은 보장돼 있다. 그러니 절제 따위는 잊어버리고 실컷 즐기며 

살자.' 그것이 당신의 속 생각이라면 당장 멈추라! 그것은 위험한 논리다.

당신은 속고 있다. 내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 하지만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물을 필요가 있다. "내가 구원을 받기는 한 건가?"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살리요"(롬 6:1-2).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여러분이 항상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할 때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주 분명합니다. 사랑 없이 되풀이되는 값싼 섹스, 악취를 풍기며 쌓이는

정신과 감정의 쓰레기, 과도하게 집착하지만 기쁨 없는 행복, ... 살벌한

경쟁, 모든 것을 집어 삼키지만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잔인한 기질,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받을 줄도 모르는 무력감, 찢겨진 가장과 찢어진

삶, 편협한 마음과 왜곡된 추구, 모든 일을 경쟁자로 여기는 악한 습관,

통제되지도 않고 통제할 수도 없는 중독... 등이 그것입니다. 더 열거할

수도 있지만 그만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가 여러분에게 경고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

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자유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갈 5:19-20, 메시지).


분명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뻔뻔스럽게 죄 짓는 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니다.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기에, 속으로 "얼마만큼 죄를 짓고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는

"나는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의 마음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다시 말하지만, 죄를 지었을 때는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상관없다.





 존 비비어의 [은 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