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변승우 목사님 글 2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

놀라운 주의 사랑 2015. 8. 3. 17:58






겔 14: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교회에 목사들도 문제지만 장로들도 문제입니다. 농담으로, 


대한예수교목사회도 없는데 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다 있습니까? 


장로들의 힘이 교회 안에서 굉장히 셉니다. 


장로라면 아론과 훌처럼 담임목사를 보필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영적인 위계질서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어제 잠깐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혼과 영이 갈라져야 합니다. 


교회의 비극 중에 하나는 수많은 설교가 목회자들의 영에서 나와야 하는데 


혼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혼에서 나오면 판단의 주체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자기 생각, 자기 잣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이건 옳다, 저건 그르다......'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설교의 상당수가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들은 것, 배운 것, 지금까지 지나온 과거나 행적에 의해서 고착된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굳어진 생각에


하나님 말씀을 맞추고, 또 성령이 역사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성령께 자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고 자기 생각에 성령을 재단합니다.


감히 성령님께 대하여 교회에서 이건 해도 되고 이건 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교회에서 방언하면 안 된다고 금지시킵니다. 


그것은 목사가 성령보다 높은 것이고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방언의 은사가 나오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분명히 방언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방언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통용될 수 있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혼하고 영하고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혼하고 영하고 


갈라져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나 책을 읽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준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냐 하면, 혼적으로 얼마나 예리하고 얼마나 탁월하고 


얼마나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잘하느냐? 그런 것을 보고 대부분 책을


고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교도 그런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착각하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혼적으로 뛰어난 책이나 설교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저자가 영의 사람인가? 성령은 혼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영에 거하십니다. 


혼은 귀신들이 점령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0장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생각, 


이념들, 이론들이 사탄의 견고한 진이라고 했습니다. 진(陣)은


일종의 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안에는 그 성의 주인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견고한 진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생각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개념들, 이론들, 논리들, 그게 교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 안에 귀신이 자리 잡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 버림받을 수 없다.' 


이런 교리 안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을 꾀어서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귀신들이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혼이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너희 혼을 구원할 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혼은 영이 아니라 혼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이 구원받는 것은


거듭남으로 되는 것이지 그렇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생각이 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사탄의 견고한 진은 혼적인 생각으로 구성된 인간의 생각들이고,


그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은 성령에 의해서 조명되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기름 부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것이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입니다. 진짜 강력한 것은 기름 부어진 말씀입니다.


말씀보다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망가진 인간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재창조하십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나니


곧 항상 있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성령에 의해서 조명된 말씀, 성령에 의해서 기름 부어진 말씀보다


능력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영뿐만 아니라 혼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 선 검처럼 영과 혼을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



그러면 말씀이나 계시가 혼에서 나오지 않고 영에서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혼이 깨어져야 합니다. 혼은 어떻게 보면 자아입니다.


바꿔 말하면 자아인데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야 합니다.


겔 14:1-5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의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음으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장로들이 나왔는데 그 마음에 우상을 들였다고 그랬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여러분 마음에 있는 것이 우상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려고 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계 3:20)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신학적인 개념의 주제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좌정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상은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본문의 장로들처럼


우상을 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 우상을 들였습니다.


마음에 들인다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충성과 헌신이고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은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내가 무엇에 헌신 할 것인가? 


내가 돈 많이 벌고 부자 되기 위해서 산다.'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맛있는 거 먹고 돈 벌어서 좋은데 여행 다니고 외국에 여행 다니기 위해서 


돈 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쾌락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 이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자기가 헌신되어 있는 것이 자기의 신입니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갈 5:6)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접한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줄 


알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와 있는 것, 그것이 마음에 들인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헌신할 것인가?


그것이 정해지면 그게 내 맘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무엇을 사랑하고 실제로 섬길 것인가? 그것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와 있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방인도 아니고 우상 숭배자들도 아닙니다. 장로들 입니다.


그들은 집에 우상을 들인 적이 없습니다. 


보통 불교 믿는 사람들은 집에 우상을 들입니다.


그런데 불교 믿는 사람들의 우상은 실제로는 부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부처를 자기 마음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집에는 열심 있는 사람이 불상을 세워놓고 거기다 절할지 몰라도 


부처 믿는 사람들이 부처를 자기 마음에 들였느냐? 안 들였습니다. 


자기 마음의 욕심을 위해서 부처를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우상은 부처가 아닙니다. 그들 속에 있는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것이든 성공에 대한 것이든 세상 모든 종교가 한마디로 


소원 성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간단히 말하면 소원입니다. 


불상을 집에 들일 수 있지만 불상을 마음에 들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는 우상이 불상이 아니고 다른 것입니다. 불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우상은 다른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로들은 오늘날로 따지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성도들이 집에 불상을 들여놓고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집 안에 우상을 들인 일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자기 집안에 들여놓은 일이 없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을 자기 마음에 들였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이 사람이 우상 숭배자가 아닙니다. 


우상을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고 우상 앞에 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음을 꿰뚫어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이 사람들이 우상 숭배자입니다. 


이들이 장로가 아니고 우상 숭배자입니다. 


"우상 숭배자가 우상 앞에 가서 묻지 왜 내 선지자 앞에 가서 묻느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우상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기독교인이 다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실제로 무엇을 영접했느냐? 


라오디에게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영접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라오디게아교회의 특징은 


미지근한 것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무엇입니까? 


종의 삶은 미지근할 수가 없습니다. 


종은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야 하고 


잠도 못자고 열심을 다해 일 하는데 종이 어떻게 미지근할 수 있습니까? 


종은 불꽃처럼 바람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자를 불꽃처럼 바람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불꽃 같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바람 같습니다. 


그들은 불꽃처럼 타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열정으로 천사들은


불꽃처럼 타오릅니다. 그들은 쉬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람처럼 움직입니다.


항상 주님을 위해서 활동하고 움직입니다. 헌신된 사람처럼!


우리가 진짜 쓰임 받으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불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주님을 섬기겠다는 굳은 의지, 주님을 향한 열정, 


미지근한 것이 아닙니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것으로는 안 됩니다.


불꽃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바람처럼 움직여야 정말로 주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에교회 성도는 미지근했습니다.


미지근한 것은 실제로 주님께 헌신이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단호한 결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는 단호한 의지적인 결단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서 그냥 신앙고백에 동의 하고 교회 나와서 때 되니까 


예배드리고 십일조 드리고 취미에 맞으면 성가대나 서고....


그런 사람들 속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도 없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우상을 마음에 들이지 말고 예수님을 마음에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불교를 믿는 것하고 다릅니다. 


성철도, 그 누구도 부처를 위해서 열심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세상 종교는 하나님을 위한 종교가 아니고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 종교는 다 가짜입니다. 


회교든 불교든 모든 세상 종교는 다 가짜입니다.


원래 있지도 않은 것을 사람이 다 조작하고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람이 꾸며내고 날조해 낸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냅니까?


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모든 우상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신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신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을 위한 종교가 딱 하나 있는데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먹어도 마셔도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종교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내 배를 불려보겠다고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짜 종교들은 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똑같은 석고상을 앞에 놓고 데생을 해도 


그 사람의 얼굴과 성격이 그 그림 안에 드러납니다. 


저도 과거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잘 압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데생을 보면 그 사람이 거기 나와 있습니다.


반드시 그 사람의 얼굴이 거기 나와 있습니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데생한 그림을 보면 차가운 느낌을 주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똑같은 그림인데도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은 뭔가 실쭉샐쭉하고...... 


다 속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 이기심 그런 것이 우상 숭배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을 위한 것 같지만 신을 위한 것이 없습니다.


회교도들이 목숨을 버린다, 테러범이 되어서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부딪혀서 같이 죽는다, 그게 신을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잘못된 말들에 세뇌가 되어서 살인하는 자인 


사탄에게 철저하게 속아서 그러면  자기의 영원한 인생이 보장된다니까,


그러면 순교자가 되고 영광을 얻게 된다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불교든 


어떤 세상 종교에도 그 안에는 윤리 도덕은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입니다(롬 5:8).


하나님은 원수 되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과 모든 피를 쏟아내셨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라고 반응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사랑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역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잘못 아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천국 간다.'는 그 당시의 이단 사설들을 


많이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할례 받고 안 받고 이것 때문에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없으면 지옥 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보고 난 후 


"아, 내가 예수님을 봤기 때문에 이제 주님이 존재한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봤기 때문에 무언가를 체험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고 안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믿고......"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 즐거운 소식이다. 그런데 변 목사가 말하는 것은 


두려운 이야기들이 많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소망이 없는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고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있음으로 해서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 자체가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인데 그것이 왜 기쁜 소식이


아니라는것입니까? 그러니까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회개 때문에 보혈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이제 그분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보혈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회개해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이 무엇이고 회개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데 이것이


왜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잣대로 보면 안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아도 가짜 믿음이라도 신앙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다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이기심이 자기를 속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이기심이 미혹의 영들을 불러들여서 진리의 성령을 가리우고 


스스로를 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복음은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신 그분의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를 


측량할 수없는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아, 나는 이런 진리를 믿습니다."


그건 전혀 합당한 반응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참으로 합당한 반응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참으로 합당한 반응은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다 안 믿는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함있는 산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지옥 간다고 하니까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율법적인 노력,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 있는 산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할 때 그 말씀을 지킬 수있게 됩니다. 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한일서 5장 3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진정한 믿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정말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포기하셨다는 사실을 정말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늘 보좌와


영광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그토록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을 정말로 믿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는 거니까 복음 진리들을 "아, 그거 거짓말 아니야." 


그리고 불교 믿고 유교 믿는 거처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정말 진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니까 믿음이라고 부르지만, 


"기독교의 복음 진리가 진리인 것을 나는 인정하고 믿는다." 


단순히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런 믿음으로는 지옥 갑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이 책의 제목이 무엇이 이상합니까?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지옥 가는데!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때 그 사람의 믿음에 


정말 삶이 따르는가? 


그것을 점검해 보고 그런 사람만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까?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모두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제목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진정한 믿음은 복음 진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사실인 것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성경에서는 믿음으로도 나오지만 이 믿음이 또한 무엇이라고 나옵니까?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능히 구원받지 못한다." 이런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런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영접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복음 진리 믿으면 그것이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이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접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는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상을 마음에 들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마음에 들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에 들입니까? 


돈을 사랑하고 돈을 위해 헌신하고 돈을 귀하게 여기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예를, 쾌락을, 번영과 성공을 그렇게 마음에 들입니까? 


여러분이 그런 것을 마음에 들이면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바울이 "탐하는 자는 곧 우상 숭배자이고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말한 것입니다. 장로라고 하지만 우상을 그 마음에 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자기 집 안에 들이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우상을 마음에 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우상이 있으면 그 우상을 깨뜨려야 합니.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습니다."


분명한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일어버리면


다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날 에베소교회 같은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칭찬받을만한 많은활동을 하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그래서 회개치 않으면 가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촛대를 


옳겨버릴 그런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우상을 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우상을 들이지 말고 주님을 영접하세요.


주님을 들이세요.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도록 하세요. 


주님이 내 안의 보좌에 좌정하시도록 하세요. 


그분이 나를 다스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사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사랑하는여러분, 여러분 속에 무엇이 있는지 이 시간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마음에 무엇을 들였는지 살펴보십시오. 


우상은 내 마음에 들인 것입니다.


좀 전에 제가 성경 말씀을 읽고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성령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그 마음에 들여놓는 것이다."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 들여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엇을 들여놨습니까? 


주님이 계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분에게 헌신 되어야 합니다. 그분께 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사랑이라야 됩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미지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자들의 마음 문 밖에 계십니다. 


그 입에서 토하여 내쳐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미지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 속에 주님을 향한 헌신과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의지가 불꽃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어 놓으시고 온몸에 피를 흘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여전히 이기적으로 반응하고,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은밀하게 내 마음에 우상을 들이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까? 


주님 회개합니다. 이제는 진실로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고,


내가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살기를 원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처럼 그 속에 주님이 없으면서도 있다고 신학적으로 


가장하고 고백하는 종교 생활이 아니라, 


주님을 진정으로 내 마음속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과 동역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시간 그렇게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 제 4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