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사랑 ♡ 글

바울의 사역의 목적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3. 18. 22:39




바울의 사역의 목적




"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체를 갖추실 때까지 다시

여러분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내가 지금이라도 여러분과 함께

있어서 내 언성을 높이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로 인해 당혹스럽기 때문입니다"

(갈 4:19-20).


19절은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현재와 같은 고통을 아끼지 않는 목적을 기술

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수고한 것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한다. "나의

자녀들이여"하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복음

선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방인들을 회심케 한다는 의미다(참조. 고전 4:15).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해산의 그림언어를 훨씬 도발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

지금 바울은 마치 처음 갈라디아에 와서 해산의 수고를 했던 것처럼, 다시금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 이 산고는 갈라디아 공동체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체를 갖추실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바울이 낳으려

하는 아기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모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바울의 사도적 목적인 것이다. 2장에서 바울은

자신은 죽고 이제 자기 속에는 그리스도만 살아있다고 말했다(2:20). 다른

곳에서는 이것이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빌 1:20)


"그리스도께서 형체를 갖춘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2:20), 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분명히 듣고 배웠던 그리스도

(3:1)를 그들의 삶을 통해 가시화하는 것이다(참조. 엡 4:20-24). 갈라디아

서에서 이는 '사랑을 통해 활성화되는 믿음'의 삶이요(5:6), 5-6장에서 길게

묘사하는 것처럼 '성령의 발맞추어 살아가는 삶'이다.


바울은 바로 이것이 태초 이전 하나님이 구원의 뜻을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

하시기로 예정하셨을 때 마음에 두셨던 영원한 계획의 핵심이라 가르친다.


"하나님이 또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롬 8:29).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1-5).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10).


바울의 목표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학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받은 사도적 사명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것이

었으며,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계획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

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과정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듯이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본받는 사람

들이 되라는 권고 역시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다.


20절은 다시금 바울의 현실적 좌절감을 표현한다. 지금이라도 갈라디아

로 달려가고 싶다. "언성을 높인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음성을 바꾼다"

는 모호한 표현이지만, 문맥상 개역개정판의 번역과 같은 의미일 가능성

이 높다. 만약 바울이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온유함보다는 강한 질책의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참조. 고전 4:21).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 바울은 그들로 인해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상황을 잘 모른다

는 의미에서의 '의구심'은 아니다. 바울은 현 상황이 배교의 버금가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질책의 의도를 담은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 "내가 깜짝 

놀랐다"(1:6)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에 

갈 수 없는 입장에 있다. 물리적인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갈라

디아인들과 '원수'가 된 마당에 간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판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 정확한 이유는 

알 도리가 없다.





- 권연경 교수님의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중에서...



'▤ 작은 천국의 도서관 ▤ > 사랑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겸 손!  (0) 2016.04.15
새로운 피조물의 본성  (0) 2016.03.26
세상의 빛 예수  (0) 2016.03.04
하나님 나라는 초월에서 은혜로 온다  (0) 2016.02.13
재 생 산!  (0) 201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