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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 예수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3. 4. 21:30




세상의 빛 예수



8장 이전에서는 예수와 유대인들의 충돌이 주로 예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신앙적 반응으로 일어났다면, 8장에서는 예수와 유대인들의

논쟁과 대화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예수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의 목소리도 보다 많이 듣게 된다. 논쟁은 예수의 기독론적

자기 선언과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꼬리를 잡는 형태로 이루어져 결국 가장

쓰디쓴 충돌로 이어진다. 예수와 유대인들 간에 오간 논쟁적 대화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대화(요 8:12-20)


예수 : 나는 세상의 빛이다.

바리새인들 : 네가 너 스스로를 위해서 증거하니 네 증거가 참되지 않다.

예수 : 나는 스스로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증거해도 참되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즉 하나님)가 같이 증거하니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거이므로 참되다.

바리새인들 : 내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 : 너희는 나와 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7장과 연관되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나는 ... 이다"라는 신적

자기 계시 문구를 사용해서 계속해서 자신의 본질을 천명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라는 선언에 대해 유대인들은 어떤 증거를

참이 되려면 두 사람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 율법의 원칙(민 35:30; 신 17:6;

19:15 참조)을 들어 예수의 말을 반박한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가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증거가 참되다고 한다. 물론 바리새인

들은 예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국 예수를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인데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번째 대화(요 8:21-29)


예수 :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 : 네가 자살하려는가?

예수 : 너희와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만약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 죽으리라.

유대인들 : 네가 누구냐?

예수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부활한 후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게 되리라.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대화 상대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는 자신이 고난, 부활, 승천을 통해 영광 받는

것을 '떠난다'는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이것을 예수가 자살

하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결국 예수는 이들에게 심판의 메세지를 전해야

했다. 예수가 "내가 그"라는 문구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결국 심판을 받고 죽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대화(요 8:30-47)


예수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유대인들 :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남의 종이 된 일이 없다.

예수 :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유대인들 :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예수 :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행사를 한다.

유대인들 :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예수 : 너희 아버지는 마귀다.


이 대화의 주제는 사람의 주권과 관계된 것이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죄의 노예가 되고, 그 사람은 결국 마귀의 자식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의 말을 들을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직접 유대인들

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그 이전과 이후에 행해지는 어떤

말보다도 쓰디쓴 심판의 메시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은, 민족

으로서의 유대인을 가리키기보다는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 당국자들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네 번째 대화(요 8:48-59)


유대인들 :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 들렸다.

예수 :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들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 :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네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

       보다 위대하냐?

예수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

       하였노라. 

유대인들 : 네가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의 쓰디쓴 심판의 메시지에 유대인들이 반발하며 예수를 사마리아

사림이요,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공격한다. 어떤 연유에서 예수를 사마

리아 사람이라고 공격했는지 명확치 않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

인은 비정통이며 이단자들이었다. 예수는 이들의 말에 반박하며 영생의

메시지를 전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예수가 오히려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엉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는 아브라함은 인간적 출생에 의해 존재한 사람

이었고, 자신은 신적 존재라는 것을 천명한다. 이것에 대해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여 예수를 돌로 치려 한다.



해석과 적용


요한복음 7-8장에 나와 있는 예수와 유대인들의 충돌을 간단히 말하면,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신적 존재라고 주장하고 유대인들

은 이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반박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 충돌은

양편에서 서로 양보나 타협을 통해 '제 3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자신이 신적 존재라고 천명하는 것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이것을 

거부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다.


어떤 학자들은 이 충돌이 양자에게 조금도 타협점이 없는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에 그것을 누그러뜨리는 의미에서 이 충돌은 역사적 예수와 유대인들

의 갈등을 반영하기 보다 역사상 1C말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 간의 쓰디쓴

충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90년대에 얌니아(혹은

야브네)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단에 대한 저주 선언문'에

의해 기독교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회당에서 축출한 사건을 반영한다

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저주를 받고 회당에서 축출당한 경험으로

인해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에게 요한복음 본문에 반영되어 있는 것과 

같은 쓰디쓴 갈등과 저주를 표출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예수의 기독론적 자기 계시는 실재했던 것이며, 그것의 충격은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을 억지로 누그러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역사상 유대인들

이 경험했던 이 충돌은 그 이후에 오는 모든 사람이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든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

를 선택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바로 이러한 충돌에 대한

묘사를 계속해서 다룸으로써 그 충돌이 실재하고 있으며, 의미 있는 것이며,

독자가 믿음으로 결단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쓰는 것을 강조한다. 아브라함

이 존재하기 전에 예수가 존재했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거짓

말이요 사기라는 해석 아니면, 그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예수가 신적 존재라

는 결론 두 가지 중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언명 앞에서 신앙

혹은 불신앙 중 한 가지로 결단해야 한다.


어떤 학자는 요한복음에서 어떤 사람의 운명이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마귀에 속한 자(요 8:44)와 하나님께 속한 자(요

8:47)로 구분되었다고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에서 두 가지 운명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요 1:10-13; 3:3-8; 

3:31-32a; 8:21-24, 42-44a, 47), 이것이 정해진 운명은 아니다. 

현재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어떤 사람의 행동이 그렇게 나온다

는 것이다. 믿음으로 마음이 정해지면 주인이 바뀌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예수의 메세지를 순종으로 화합하게 된다. 예수는 계속해서 새로 태어남

을 통해서 마음의 주인을 바꿀 것을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 김동수 교수님의 [요한신학 렌즈로 본 요한복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