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 작은 천국의 도서관 ▤/사랑 ♡ 글

재 생 산!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1. 27. 19:54




제 8 장 

재생산(Reproduction)


주님은 그들이 열매 맺기를 기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나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닮은 사람들을 생산하게 하실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행하시는 주님의 사역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 진행되는 그의 사역에

의하여 여러 배로 불어날 것이었다.


그들과 닮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사역은 제자들이 주님과 더불어

알고 있었던 기회를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알 때까지 무한정한

범위까지 계속 확대될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에 의한 세계 정복은 오직 시간

문제요 주님 계획에 대한 제자들의 충성의 문제일 뿐이었다.


에수님은 제자들 안에 사망과 음부의 권세에 도전하고 그것을 물리쳐 이길 

교회 조식을 세우셨다. 그것은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했지만 크기와 힘에

있어서 "모든 나물보다 큰" 나무가 될 때까지 자라게 될 것이다(마 13:32;

참조, 막 4:32; 눅 13:18-19).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일 기대하시지는 않았지만(주님은 사람들이

은혜에도 불구하고 반역할 것을 알고 계셨다),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이 모든 피조물에게 설득력 있게 선포될 날을 내다보셨다.


그러한 증거를 통하여 전투하는 주님의 교회는 언젠가 승리하는 교회가 되는

바로 그때에 우주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정복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박해와 순교를 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백성들이 통과하게 될 시련이 아무리 크고, 일시적인

작은 싸움에서 아무리 많아진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승리는 확실하다.


주님의 교회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영원히 교회를 압도하거나

교회에 끝까지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마 16:18, 확대성경)



증거를 통한 승리


미래에 대한 이런 믿기 어려운 확신은 현재 주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지식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주님은 제자들이 최소한 그의 영광의 

핵심을 배웠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 무리의 대변인격인 베드로는 예수님께

드린 고백에서 그것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참조, 

막 8:29; 눅 9:20). 여기에 파괴할 수 없는 진리가 있었으며, 예수께서 장차 

얻을 승리를 마음 속에 그리신 것도 이런 기초 위에서였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이 말씀은 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먼저 시작하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이 구절의 교회론적 함의로 야기된 흥분을 떠나서,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개인적으로 주님에게 신앙 고백을 했던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자기의 스승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런 깨달음은,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가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었다(마 16:17).

그렇지만, 그의 생활에서 그런 계시를 체험한 것은 분명히 주님의 "살과 피"

(혈육)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었고,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교회가 멸망할 수 있겠는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의 신앙은

바위 - 베드로가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그의 주님으로 깨달은 바위, 모든

신자들이 "산 돌"이 되어 그 위에서 주님의 교회를 지어가는 바위 - 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그의 삶에 깊이 새겨졌다(벧전 2:4-8; 참조, 엡 2:20-22).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보지 못하면 안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 두 역동적

요소를 하나로 묶는 데에 예수님의 전도 전략의 최고의 천재성이 있다.



준수된 원리



모든 것은 제자들에게 귀착된다. 그들은 주님의 포위 공격의 선봉대였다.

주님은 "저희 말을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요 17:20),

그 사람들이 다시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마침내 온 세상이

주님이 누구시며 무엇하러 오셨는지를 알게 되기까지 이루기를 바라셨다

(요 17:21, 23). 


주님의 전체적인 전도 전략은  - 사실, 주님의 참 목적의 성취는 그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이다 - 주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의 이 과업에 대한 충실성에 달려 있었다. 그들이 열매를

맺고 또 자기 제자들에게 재생산을 하도록 가르치는 한, 얼마나 적은 수로

시작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님의 교회는 이런 방법 - 즉, 주님의

영과 방법에 마음이 움직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구주를 잘 아는 사람들의 헌신된 삶을 통한 방법 - 으로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비록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복음이 세상을 정복해 가는

방법이었다. 주님은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다.



주님의 사역을 위한 시험


최종적인 엄격한 시험이 있었다. 주님이 떠나신 후에도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계속할 것인가? 혹은 더 핵심적으로 말해서, 제자들은 육신을 입으신

주님의 직접적인 지도가 없이도 그전만큼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너무

지나친 요구로 들릴지 모르지만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영적 성장이 이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예수님으로서도 제자들에게 투자

하신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대했던 성과를 나타내리라고 결코 확신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주님의 영과 방법을 이 일을 계속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못한다면, 주님이 여러 해 동안 그들과 더불어 일하신 것은 곧 허사로 돌아가

말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재생산하는 데에는 주님의

생명이 필요할 뿐 아니라 결코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처럼 잊혀지지 않게

심어주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한 예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 수 있다(요 15:1-17). 주님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비유 가운데 하나인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포도나무(그 자신)와 가지(믿는 자들)의 목적은 열매를 맺는 데 있음을 설명

하셨다.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농부의 손에 잘려 나간다. 그것은

쓸모가 없다. 


나아가, 열매를 맺는 가지들은 더 많이 맺을 수 있도록 농부가 가지치기를

해준다(요 15:2). 포도나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지탱해 주고 있는 힘이 생명

없는 가지에는 끝없이 공급될 수가 없는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가지의 본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자로 

있는 한, 주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요 15:5,8), 나아가 그들의 열매는

항상 있게 될 것이다(요 15:16).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은 모순된 사람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이 원리는 주님의 사역 전반에 걸쳐 거듭 강조되었다. 그것은 세상을 위한

주님의 희생에 대한 필연적인 보상으로 이해되었다(요 12:24; 참조,

17:19). 그것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하셨다(마 7:16-23; 눅 6:43-45). 그것은 추수의 일꾼으로

수고한 것에 대해 제자들에게 주시는 삯으로 해석되었다(요 4:36-38).


그것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 때문에 자기 마음 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질식시켜 버린 사람들에게는 부인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막 4:18-20; 마 13:22-23; 눅 8:14-15). 그것은 주님의 눈에

그처럼 사악하게 보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생활에는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관찰되었다(마 3:7-8, 12:33-34; 눅 13:6-9). 다양한 방법으로

온갖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생활의 열매를 평가할 사람들을 

부르셨다. 이것은 그들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열매 맺는 일을

먼저는 우리 안에서 그 다음엔 다른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보다 넓은 관계로 본 곳에서는, 주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하나같이 이 원리를 지향하였다.



대위임 명령


교회에 주신 그리스도의 대위임 명령은 이 원리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 요약해 놓았다(마 28:19). 여기에 나오는 낱말은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자신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사람들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사명은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을 공부해 보면 한층 더

뚜렷해진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등은 모두 하나의 지배동사인

"제자들를 삼아"에 의존하고 있는 분사들이다. 이것은 대위힘 명령이 단순히

복음을 전하러 땅끝까지 가는 것이나(막 16:15),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많은 개심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나,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삼는 것" 즉,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의 명령에 매여 주님을

따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길로 인도할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라는

뜻이다. 제자를 세울 때만이 비로소 다른 활동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추수할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라


지도자를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이미 무리들이 추수할 수 있게 무르익었다는

것을 그 자신의 사역을 통해 나타내 보였지만, 그러나 이끌 영적인 목자들이

없다면 어떻게 그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하고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9:37-38; 참조, 눅 10:2). 


이 말 속에는 절규에 가까운 어조가 담겨있다. 무리들의 영혼을 돌볼 일꾼들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절규다. 세상을 위해 기도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세상을 사랑

하셔서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주셨다. 그렇다, 세상을 위해 막연하게 기도해봐야

소용없다. 세상은 죄 안에서 상실되고 눈이 멀어 있다. 세상을 위한 유일한 

희망은 구원의 복음을 들고 사람들에게 나가 그들을 구주께 인도하여,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과 함께 충성을 다해 인내하며 부지런히 일하는 데 있다.

마침내 그들이 구속주의 사랑으로 자기를 둘러 싼 세상을 구원하는 충성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말이다.



우리 생활에 적용되는 원리


마지막으로 우리의 생활과 증거가 세상의 구주이신 분의 지고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가를 우리 모두가 평가해야 한다. 우리를 따라 그리스도께

온 사람들이 지금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제자를 만들기 

위해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주의하라. 멸망해 가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일은 꼭 해야 할 일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믿음 안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키우는 것도 첫열매가 존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으로, 그들이 영혼들이 영혼들을 얻을 수 있도록 내보내는 일도 권장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일을 영속시키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은 단순히 개심자들이 나가서 더 많은 제자들을 얻는 게 

아니라 그들 중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지도자들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세대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일은 복음으로 구속 받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그것이

계속되도록 해놓기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전도의 시금석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고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계속되는 그 일에 효과에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그 성패를 가늠해야 할 기준은 얼마나 많은 이름을 명부에 보탰는가 또는 

예산이 얼마나 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영혼들을 얻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증거가 궁극적으로 미치는 범위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가치의 척도는 영원성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모두 이 관점에서 우리 생활과 사역을 다시 살펴볼 때가 아닌가?

도슨 트로트맨(Dawson Trotman) 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사람들은 어디

있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의 수고를

증명해 줄 참 제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장래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라. 


이는 즉각 우리의 영향력을 배가시켜 주지 않겠는가? 또 첫 번에 성공한

것과 똑같이 우리를 닮은 사람을 또 하나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라. 이는

우리의 생명을 네 배 이상 증식시켜 주지 않겠는가? 이론적으로 볼 때

적어도 이러한 증식 방법을 사용하면 우리의 사역만으로도 멀지 않아

큰 무리에게 복음으로 손을 뻗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제자로 부른 그 사람이 참으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말이다.


........



 로버트 콜먼의 [주님의 전도계획]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