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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진리에 머무르라!

놀라운 주의 사랑 2016. 4. 20. 20:36




복음 진리에 머무르라(7-12)


(갈라디아서) 7-12절은 1-6절의 연속이지만, 질책의 화살이 성도들 

배후에서 그들을 혼란케 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에게로 돌아간다.



7 여러분이 잘 달려왔었는데, 누가 여러분을 막아 서서 진리를 순종치 

못하게 만들었습니까?   8 그들의 설득은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합니다.  10 나는

여러분이 어떤 다른 마음도 품지 않을 것이라고 주 안에서 확신합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여러분을 혼란케 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내가 여태 할례를 전하고 있다면 왜 여태 박해를 받겠

습니까? 그랬다면 십자가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12 여러분을 혼란케 하는 자들이 아예 거세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7절의 수사적 질문은 이전의 "여러분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끝내려고 합니까?" 하는 질문을 연상시킨다(3:3). 또한 4:12-20에서처럼,

갈라디아 성도들의 아름다웠던 과거와 진리를 저버리는 가슴 아픈 현재를

강하게 대조한다. 달리기 이미지는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비유 중 하나다

(2:2 ; 고전 9:24-27 ; 빌 3:12-14 ; 딤후 4:6-8). 그들을 "방해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경주장 안으로 난입하고 경주를 방해하여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의의 소망이라는 목표를 향해 잘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선동자들의 방해로 인해 달리기를 멈춰 버렸다. 더 이상 

"진리에 순종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표현은 단순한 교리적 오해를 넘어

서는 실질적인 파행적 행태가 공동체 안에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8-9절은 갈라디아 신자들을 "막아서는" 세력, 곧 선동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그들의 '설득'(개역개정판은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 곧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선동자들의 가르침을 '설득'이라 묘사한 것은 그들의 메세지

속에 그 나름의 설득력 흡입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메세지의 흡입력이란 신적 생명력

에서 생겨나는 복음적 위력이 아니라,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수준의 피상적

매력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과 무관한 그 가르침을 추종하는 것은

"너희를 부르신 이를 떠나는" 배교에 해당한다(1:6). 그들이 버린 것은 

'복음의 진리' 곧 그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이었다(1:8-9). 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어졌고(1:11-12), 그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사도직 역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났다(1:1). 그래서 바울의 복음과 

사역에는 성령의 역동적 활동이 감지되었다. 이 역동적 복음을 따르는 것만이

그들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인데, 그들은 지금 이 진리 순종하기를

거부하게 된 것이다. 


선동자들은 온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적은 누룩'에 불과하다. 이 표현으로

보아 선동자들은 소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온 교회를 "요동케"

할 정도였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적은 양으로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

처럼 위험한 존재들이다. 물론 이는 갈라디아 신자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

키기 위한 그림언어다. 고린도전서 5:6-8에도 바울은 동일한 비유를 활용

하여 고린도 성도들에게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내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

이라는 누룩 없는 떡'으로 "유월절을 지키자"(곧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자")

고 권한다. 누룩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누룩을 제거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누룩 같은 존재들을 내버

리라는 것이다. 


10절은 갈라디아 신자들과 선동자들의 심리적 거리를 버리려는 바울의 의도

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갈라디아 신자들을 향해 조심스러운 신뢰의 표현을

던지고(10절 상), 다른 한편 선동자를 향해 심한 저주를 퍼붓는다(10 하).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줄 "확신한다"는 것은 사실적 의미의 확신이라기 

보다는 수사적 호소에 가깝다. 어머니가 잘못된 행동을 한 아이를 야단치면서

조심스럽게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엄마 말씀 잘 들을 거라고 믿어"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다. 곧 신뢰를 표현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그들을 두고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고(4:20) 그들이

현재 배교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했다(1:6 ; 3:3 ; 4:8-11). 하지만 바울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신뢰의 표현을 통해

그들을 다시 복음으로 회복시키려 시도하는 것이다. 반면, 그들을 요동케

하는 선동자들은 불가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은

선동자들의 헛된 가르침에 속아 의의 소망이라는 목표를 상실할 위험에 

처했지만, 선동자들 역시 성도들을 현혹한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 선동자들은 여럿인 것으로 보이지만(1:7 ; 4:17 ;

6:12-13), 여기서 바울은 '여러분을 혼란케 하는 자'라는 단수형을 쓴다

(3:1 ; 5:7). 아마도 선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인 것

으로 보인다. 1:8-9에 나왔던 저주 선언도 그렇지만, 여기서의 심판 선언

역시 선동자들을 향한 정죄 선언을 넘어, 이 편지를 실제로 읽게 될 갈라

디아 신자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의 기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11절에서 바울은 선동자들과 자신을 대조한다. 이런 분명한 대조는 6:11

이후에 다시 반복된다. 바울은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고전 4:10-13 ; 고후 6:1-5 ; 11:23-33). 그 이유는 바울이 할례를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 반복된 "지금까지"는 바울의 표현을 애매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지만, 지금까지 고난을 견디면서도 복음의 진리를 견지하는 모습

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듯이, 바울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3:1)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다(고전 1:23). 하지만 그가 할례를 전했다면,

곧 유대인으로서의 외면적 정체성이 구원의 요건이라고 가르쳤다면, 십자가

복음이 더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걸림돌을 회피하는

것이 선동자들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타협을 거부하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해 왔다. 지금까지 겪어 온 바울의 박해의 여정은 그런

호소를 더욱 진솔하고 강력한 것으로 만든다. 바울 자신에 관한 이 구절의

언급은 1-2장의 자전적 회고 부분과 마찬가지로 대조를 통한 질책의 한

방식이다. "나는 지금까지 복음의 진리를 지키며 박해를 감수하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여러분들은 진리 순종하기를 포기합니까?"하는 꾸짖음인

셈이다(참조, 3:4). 


12절은 다시금 선동자들을 향한 비난이다. "스스로 베어 버린다"는 것은

남자의 포피만 자르는 할례와는 달리 생식기 전체를 자르는 거세를 의미한다. 

이는 할례에 집착하는 이들을 향한 심한 악담이다. 그 의도를 다소 거칠게

풀어 보면 이렇다. "너희가 그렇게 자르는 데 관심이 많으냐? 그렇다면

째째하게 포피만 자르고 말게 아니라 아예 전부 잘라 버리지 그러냐?"

바울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희화화함으로써 그런 주장이 터무니 없는 것임을 부각

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 권연경 교수님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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