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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이전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

놀라운 주의 사랑 2019. 1. 7. 23:40




회심 이전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




"그러나 그때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래 신들이 아닌 것들에게

종살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알았고, 더욱이 하나님께 알려진 

존재가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보적 원리들로 돌아가 다시 

그들에게 새로 종살이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고

있는데, 내가 여러분을 위해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처럼 된 것과 같이 여러분도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8-12)


8-11절의 직접적인 꾸짖음은 바로 앞 1-7절에서 제시된 논증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스도 사건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이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의 초보적 

원리들에서의 해방이다. 그리고 이 해방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보내시

면서 구체적 현실로 확증되었다.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곧 유업을 이을 상속자들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 주도 아래, 곧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사실들의 배경에서, 갈라디아인들의 일탈 행동이

날카롭게 대조된다.


본 구절의 핵심은 과거와 현재의 대조에 있다. 바울은 종종 이방 성도들의 회심

이전의 '그때'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금'을 대조한다(고전 6:11; 엡 2:1-10,

11-22; 골 3:7-8). 물론 이 새로운 '지금'은 그의 어울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하지만 성도들의 삶이 늘 이런 '당위'에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갈라디아의 상황에서도 '그때 - 지금'의 신학적 대조는 또 하나의 불행한 대조에

의해 복잡해진다. 현재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을 알게 된 지금'은 이제 과거

지사가 되었다. 실제 갈라디아의 '지금'은, 하나님이 마련해주신(회심 이후의)

'지금'을 버리고 오히려(부르심 이전의) '그때'로 퇴행하는 배교의 시간이다.

갈라디아인들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시는 이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다시 세상의 무기력

하고 천박한 초보적 원리로 되돌아가 종노릇하려 한다. 


"돌아간다"(πιστρέϕετε)는 동사는 본래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단어다(살전 1:9).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이 동사가

그와 반대되는 움직임, 곧 역(逆)회심의 과정을 묘사한다. 곧 하나님을 떠나

(1:6) 다시금 세상의 초보적 원리로 돌아가려는 배교의 움직임이다. 율법의

행위들에 신학적 매력을 느낀 갈라디아인들은 그들 자신이 제대로 된 믿음

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의 행위들 아래 종속되는 삶은 과거 우상적 가치들에 종속되어 살던 

삶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그들의 현재 행동은 제대로 된

신앙으로의 개선이 아니라, 회심의 효과를 무의로 돌리는 역회심(counter-

conversion)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약하고 천박하다는" 수식어는 그런 역회심이 왜 어리석은 것인지 말해준다.

"천박하다"는 문자적으로 "가난하다"라는 뜻인데, 실속없이 피상적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초보적 원리들은 약하다(참조.

롬 8:2).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이런 무능력을 '율법(의 행위들)'과 연결

한다. 율법의 행위들로 귀의하는 것은 "약하고 천박한" 초보적 원리들에로

기울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과격하지만 일관

된 평가다. 율법에는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3:21). 따라서

의의 소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다(5:6).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의

연약함 혹은 불가능성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해결하셨다. 그 결과는

생명의 성령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며 비로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된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의 배후에는 바로 이런 결정적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롬 8:1-4).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능력'이라 규정

한다(롬 1:16; 고전 1:18, 24). 물론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다시금 공적으로 천명되고 확인된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가리

킨다. 성령은 이 부활의 생명이 우리 속에 역사하신다는 복음적 현실을

표현한 개념인 것이다. 


우상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안 뒤 다시 과거의 종살이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 바울의 어조는 이런 믿을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바울의

당혹감을 여실히 드러낸다(개역은 마지막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다).


"어떻게(πῶς)... 다시(πάλιν)... 다시(πάλιν)... 새로(ἄνωθεν)... (9절)


이것은 바울이 처음부터 갈라디아인들을 향해 던졌던 꾸지람의 핵심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을 부르신 이를 이렇게 금방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1:6).


"정말 어리석군요,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이렇게 어리석습니까?"

(3:1,3)


회심을 뒤집어 다시 과거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들을 복음으로 회심

시키는 바울의 사역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좇아 살아

가는 삶에 집중하기를 멈추고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데 관심을 빼앗

겨버린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당연히 당신의 수고가 "헛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11절).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나 성도들의 삶 혹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련하여

"헛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빌 2:16). 성도들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

있고(고전 15: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도 있다(고후 6:1).

그렇게 되면 바울의 사도적 사역 또한 "헛된" 것이 된다(살전 2:1; 3:5;

갈 2:1).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될 것이다(2:21). 달리기의 목적은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잘 달려 바라던 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중도에 달리기를 멈춘다면 지금까지

달린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 된다. 바울은 그런 어리석은 행태를 멈추라고

질책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5장의 질문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여러분이 잘 달리고 있었는데, 누가 여러분을 막아서서 진리를 순종치

못하게 만들었습니까?"(5:7)


8-11절에 이어 12절 하-16절은 '과거-현재'의 대조를 계속 이어간다.

그 사이에 낀 12절 상반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제시하는 요구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아 지금 우리들로서는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나처럼 되라"는 권고는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권면과 동일한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효과적인 복음의 선포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

(고전 9:19-22).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인들에게도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형편에 맞추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했을 것이다. 물론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을 바울 자신을 본받는 자로 만드는 것, 곧 그리스도

를 믿고 믿음과 성령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권면의

바탕에는 복음은 말로만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전해지는 것이라는 신념이 깔려 있다. 

복음 자체가 단순한 지식이 아닌 삶의 능력의 문제라는 신념이다

(롬 1:16; 고전 1:18, 26; 4:19-20). 그래서 바울은 끊임없이 "나를

본받으라"고 권고한다.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고전 4:6, 16; 11:1; 살전 1:5). 따라서 바울의 복음 전파 과정은 곧 

본받음 혹은 모방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복음은 말의

고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고리를 통해 전해진다. 바로 이 능력이

"권세 있는 자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였다.





- 권영경 교수님의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중에서...